또 다른 시작을 위한 몸부림
크기를 막론하고 팽이는 이내 비틀거린다. 힘차게 돌던 그 처음과 달리 초심을 잃은 듯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쓰러지는 모습이 그렇게 애처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팽이를 보면 이렇게 비틀거리는 우리가 보인다.
다만, 어느샌가 월급쟁이가 되어 다른 꿈을 꾸고 있다. 꿈 많던 젊은 시절을 지나 아저씨라 생각했던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우르르 회사 현관문을 나선다. 빌딩 유리에 비치는 그 사람들 속의 내 모습이 영락없는 아저씨다. 나이가 차서 아저씨인지, 흰색 와이셔츠를 입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월급을 받기 시작한 그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다만, 힘들 뿐이다. 회사가 나에게 버팀목이 되고, 또 내가 하는 일이 잘되어 승승장구한다면 내가 그 둘을 왜 싫어할까? 그럴 이유가 없다. 다만, 회사는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또 내가 원하는 일만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다들 같은 처지의 히스테리를 한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과의 부대낌은 더더욱. 그럼에도 살아남아 강해져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어렸을 때 회사원들이 술 먹고 밤에 비틀 거리는 모습이 그리 보기 싫었다. 지금은 내가 그런다. 당신이 그러고 또 우리가 그런다. 그 비틀거림은 참 무책임해 보였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여기저기 얽혀대는 그 모습이란. 대학생이 비틀거리면 젊음의 객기라고나 하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술이 그리 취하지도 않은 저녁. 퇴근길에 갑자기 비틀거리고 싶어졌다. 비틀거리니 신기하게도 뭔가가 풀리는 느낌. 그 날은 비틀거림을 일부러 지어냈다. 그것도 좀 더 과하게. 내가 싫어했던 그 모습 이상으로.
그저 술에 취한, 한 없이 무책임한 비틀거림일거란 생각과는 달리 직장인이 된 내가 체험한 비틀거림은 하나의 미학이다. 직장인의 자유로운 표현이자 권리이면서 어느 하나의 분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고 사는 데에 대한 고단함은 직장 내에서 정점을 이룬다. 비틀거림의 이유다. 비틀 거려야만 하는 이유다. 어깨에는 가족의 미래를 짊어진 이내들에게 그 비틀거림은 상징적인 춤사위와 같다. 또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 정말로 내려놓을 수 없는 그 책임이라는 무게를 아주 잠시라도 떨쳐내려는 듯한 퍼포먼스 그리고 몸부림. 마음이 비틀, 몸이 비틀, 영혼이 비틀. 술의 힘을 빌려 더 비틀거려본다.
쓰러지지 않는 팽이는 현실이 아님을 어느 한 영화가 못 박았다. 모든 팽이는 언젠간 쓰러진다. 쓰러지기 전엔 비틀거린다. 또 어떤 팽이는 채찍질과 함께 그 회전을 연장한다. 그래도 언젠간 쓰러진다. 단, 쓰러지면 다시 돌면 된다. 쓰러지기 전에 비틀거린다는 건, 다시 돌려면 비틀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주기로 그렇게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지 모른다. 그 사이의 비틀거림은 필수다.
마냥 추해 보이고, 무책임해 보이기만 했던 그 비틀거림이 이제는 내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밤 길에 지나가는 수많은 비틀거림을 보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건 어쩌면 비틀거림의 언어를 나도 습득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 비틀거림은 쓰러지기 직전의 그것이 아니라, 다시 서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모든 각자의 비틀거림이 그 각자에게 위로가 되기를. 행운의 춤사위가 되기를. 살풀이가 되기를. 용기가 되기를. 다시 서는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절대 그것을 부끄러워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