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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04. 2016

삶의 무게들

어린이도 삶의 무게가 있다

어느 하루아침의 대성통곡


어느 이른 아침. 출근을 위해 양치를 하다 화들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둘째 아이의 울음이 온 집안을 흔들었다. 깜짝 놀라 칫솔을 내팽개쳤다. 그리곤 방으로 내달렸다. 둘째는 자기가 자던 자리에 곧이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닭똥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닭똥 같은 눈물이었다. 잠에서 덜 깼는지 눈도 뜨지 않았다. 감은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울음소리는 또렷했다. 그 또렷함은 서러움을 배가시켰다.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 태어날 때 빼곤 본 적이 없다.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가 그러든 말든 잠에 빠져있다. 시끄러운지 베개에 더 파묻는다. 와이프와 나는 둘째 앞에 앉아 잠시 안도했다. 겉으로 보기엔 이상이 없었으니까. 어르고 달래어 왜 그런지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꾼 것일까? 어디가 아픈 것일까? 한국 나이로 6살, 그러니까 주재 생활을 하고 있는 여기 이곳 유럽 나이로는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만 4살인 둘째 아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둘째 아이의 삶의 무게


만 4살의 아이를 대성통곡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놀 시간이 부족'하단 거였다. 놀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며 더 서럽게 울어댔다. 나와 와이프는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심각한 일은 아니니 맘은 놓였다. 한 걸음에 놀라 달려온 우리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헛헛하기도 했다.


눈을 뜨자마자 가야 하는 유치원이 무의식적으로 생각났을 거다. 그리고는 더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자신은 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거다. 아니,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그래서 서러웠을 거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둘째 아이의 어깨에 놓인 '삶의 무게'를 목도했다. 만 4살 따위의 나이에는 결코 없을 거란 그 무엇이 눈에 보였다. 놀고 싶은 자아의 어깨 위에 유치원을 가야 하는 '삶의 무게'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어릴 때 삶의 무게를 동경한다


'삶의 무게'란 말은 참 어른과 잘 어울린다. 삶에 어느 정도의 무게는 느껴봐야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가장, 청년, 부모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아련하다. '삶'이란 단어도 그렇고 '무게'란 단어도 그렇다. 두 단어가 합해지면 그 무게는 더 커진다.


돌이켜보니 내가 아이였을 때도 무언가 '삶의 무게'가 있었을 거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무슨 '삶의 무게'가 있겠냐..라고 하지만 그건 어른의 생각이다. 분명 있을 거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의 그것을 잊은 거다. 그 날 아침에 본 둘째 아이의 그것도 그렇고, '삶의 무게'란 말을 '고민이나 걱정'으로 잠시 변환시켜본다면 더더욱 와 닿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릴 적엔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반하며 빨리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른을 동경했으면서. 아마 어른이 돼서 느낀 '삶의 무게'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커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그 무게는 오롯이 자기 것이 가장 큰 법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버겁다.


어린 시절은 그렇다. 모르니까, 그리고 호기심이 왕성하니까 '삶의 무게'를 덜 느낄지 모른다. 모르니까 일단 하라는 것을 하고. 그리고 그 와중에 호기심이 발동되어 무언가를 알아간다. 어른에겐 그런 거 없다. 알던 모르던 하라는 것은 일단 싫다. 호기심은 무뎌지다 못해 닳고 달아서 없어진 지 오래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도 피곤하다. 머리는 커져서 결정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결정당하는 것도 싫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더 어른이 되어간다. 아니,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끔찍한 그 무엇이 되어간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정해주는 것들이 참 편했을지 모른다. 그때야 둘째 아이처럼 자신은 왜 유치원을 가야 하냐며 울지만. 막상 유치원을 가면 누구보다 잘 뛰논다. 어른이 되어서 가장 힘든 건, 매사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에. 어쩌면 결정을 안 하는 것이 행복이었을지도.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건지 모른다.


누구나 삶의 무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지(無知)'와 '호기심'일지도.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는 '운명'이나 '명제'를 두고 본다면, 우리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니까 삶의 무게를 이겨내거나, 조금은 가볍게 하거나. 아니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그토록 동경하는 어린 시절을 벤치마킹해본다며, 정답은 아니어도 힌트는 나올 수 있다.


분명 어린 시절에도 있었을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던 그때. 몰랐으니까. 그리고 알려고 했으니까. 바꿔 말해 호기심이 왕성했으니까. 안다고 생각하니 더 무겁게 느껴질지 모르는 그 삶의 무게는. 어쩌면 모른다고 생각하면 좀 더 가벼워질지 모른다. 모르니까 도전해보고, 모르니까 당해도 보고. 그러는 와중에 호기심을 발동시켜도 보고. '모르니까 알아가려는' 이 마음가짐은, 어른이라서 잊고 지낸 가장 소중한 어린날의 '기억'일 수도. 타임머신을 타고 진짜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린 시절의 마음 가짐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삶의 무게'를 짐이 아닌, 무언가를 알아가고 배우게 하는 원동력이 될지 모른다.


'삶의 무게'에 억눌려 숨조차 못 쉬는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말일 수도 있지만. 되새겨보자.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있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차피 지워질 무게라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자는 것.




아침에 그리 서럽게 울고 난 둘째가 그랬다. 서러운 울음을 뒤로하고 다녀온 유치원,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친구와의 재미있는 놀이, 새롭게 발견한 그 무엇. 서러웠던 아침의 기억은 오데간데 없었다. 그럼에도 며칠 지나지 않아, 어쩌면 더 서럽게 '삶의 무게'를 호소하며 울어댈지 모른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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