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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24. 2023

멕시코 시티라는 고산 지대에서의 삶

라면은 저지대에서 끓여 먹는 걸로

삶이 재미를 선사할 때가 있다.

내 첫 해외 주재지는 네덜란드였는데, 어원을 풀어보면 '언더랜드'란 뜻이다. 해수면보다 고도가 낮다는 이야기다. 스키폴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는 해수면보다 5미터 아래에 있게 된다. 네덜란드 내에서 가장 낮은 곳은 해수면 아래 9미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저지대는 공기 밀도가 높다. 공기 밀도가 높다는 이야기는 산소 농도도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젠 해수면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

멕시코의 수도는 '멕시코 시티'로 몇 안 되는 고산 도시다. 고도는 2,240m다. 우리네 한라산 높이가 1,950m이고 백두산의 그것이 2,744m인 것을 알고 나면 감이 올 것이다. 저지대와는 달리 대기가 희박하다. 산소 농도도 19.5% 정도로 서울의 21.0%와는 차이가 있다.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차이는 실제로 살아보면 매우 크다. 더불어, 몸이 허약하거나 건강상 어떤 문제가 있는 경우는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산 지대에서의 삶은 어떨까?

실제로 살아보니 직접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첫째, 날씨는 좋다.


해발 고도가 높다 보니 공기가 서늘하고 건조하다.

사계절 내내 날씨 변동이 그리 크지 않다. 더 좋은 건 습도가 높지 않다는 것이다. 날씨로 인한 불쾌감은 습도와 연관이 있는데, 오히려 건조해서 문제이지 습도가 높아 힘들 일은 없다.


멕시코 시티의 연중 평균 기온은 12도에서 25도인데, 4계절의 대낮 온도는 20도에서 29도를 오가기도 한다.

겨울이라고 하더라도 일교차가 좀 있다고 느껴질 뿐 우리네 혹한과는 그 결이 다르다. 겨울은 건기, 여름은 우기로 구분되고 여름의 비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오지만 분지의 공기를 청량하게 해주는 고마운 손님이다.


4계절 내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둘째, 라면이 맛없다.


비행기에서 먹는 밥이 맛없는 이유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고도'와 '소음'이다. 음식 자체가 맛없다기보다는 맛 자체가 잘 느껴지지 않는 조건이라는 이야기이다. 고도와 관련해서는 멕시코 시티도 마찬가지다. 라면을 끓여보면 극명하게 알게 되는데, 고산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끓는점이 낮아진다. 이는 해발이 낮은 지역에 비해 약 10도 정도 낮은 온도로 끓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간혹, 내가 끓인 라면 맛에 감탄한 적이 있곤 했는데 이곳에선 그러할 일이 없다.

국물 자체가 푹 고아진 그러한 느낌이 없고, 면은 탱탱하지도 그렇다고 흐물흐물한 것이 아닌 것이 애매하다. 물론, 저지대로 휴가를 가 끓여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다.


라면 외에도, 모든 음식 자체가 저지대에서 먹는 그것과는 다르다.

멕시코 다른 지역, 그러니까 고도가 낮은 곳에서 먹을 때 더 맛있게 그리고 더 많이 먹게 된다.


뭔가 잘 끓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



셋째, 배가 더부룩하다.


고도가 높아 기압이 낮으면, 대기압보다 높은 곳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공기압의 영향으로 봉지나 포장재가 팽창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고도 변화 현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 또는 저지대에서 생산된 과자나 라면 봉지는 이곳에 오면 말 그대로 빵빵해진다. 한국에서 연고를 사 오면 그 뚜껑을 열 때 조심해야 한다. 안에 있는 연고가 찍... 하고 뿜어져 나올 정도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나 또한 'Made in Korea'이니까.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된 듯 하지만, 처음 1년 동안은 배가 위 사진 라면 봉지처럼 빵빵한 느낌이 들었고 언제나 더부룩했다. 과식이라도 하면 바로 화장실을 갔어야 했고, 먹지 않아도 무언가 부대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덜 하지만, 간혹 고도로 인한 더부룩함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넷째, 숨이 차다.


'멕시코 시티에서 뛰는 사람은 도둑 밖에 없다.'란 속담이 있을 정도다.

러닝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테니스도 치기에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러한 속담이 생겨난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계단을 오르면 한국에서보다 더 숨이 차다.

재밌는 건, 이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같다는 이야기다. 사무실 층이 다른 동료가 올라오거나 내려오면, 우리는 서로 웃으며 숨 고르고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숨이 차면 나이 탓을 하지만, 이곳에선 고도 탓을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산소 농도가 옅은 탓이다.


나이 말고, 다른 것을 탓할 수 있는 점이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랄까.


멕시코 피라미드. 계단은 보기만 해도 숨이 차다.


다섯째,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산소 농도가 낮은 건, 잠에도 영향을 미친다.

호흡 시 흡입되는 산소 농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심박수와 호흡수가 증가한다. 이로 인해 수면의 질이 나빠지고, 깊은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지금도 한 밤 중에 한두 번은 깨는 것 같다.

초기엔 네다섯 번을 깼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낫다. 그리하여 하루를 맞이하면 머리가 뿌옇도록 무겁다. 피로와 기압차, 그리고 산소 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다. 그래서 하루 중엔 가능한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단 몇 십 분만이라도 잠시 눈을 붙이면, 머릿속 뿌옇던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것에나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고산 지대의 삶도 그렇다. 더부룩한 배, 숨이 차고 머리가 뿌옇더라도 사계절 내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또 위로를 받는다. 네덜란드에선 푸른 하늘을 보는 날이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가족들 삶의 만족도는 이곳 멕시코 시티가 더 높다.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삶은 경험이자 추억이다.

마냥 좋지 않은 것들은 경험으로, 좋은 것들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으니까.


그래도, 라면은 저지대에 가서 끓여 먹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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