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함께 훌쩍 떠나 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여정
네덜란드 to 프랑스 에트르타 (597km)/ 1박
에트르타 to 옹플뢰르 (45km)
옹플뢰르 to 몽생미셸 (188km)/ 1박
몽생미셸 to 베르사유 (348km)
베르사유 to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520km)
미안한데 오늘 가족여행 가자.
금요일 점심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전화기 넘어 내 목소리의 무게를 직감한 와이프는 알았다며 준비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시간은 오후 3시 10분. 집에 들러 시간이 되는대로 주섬주섬 짐을 구겨 넣었다.
터질 것이 터진 느낌이었다. 그동안 상사와의 갈등도 그랬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이 그로 인해 잘 되지 않았다. 결과가 뻔히 보일 일에 고집을 피운 상사는 결국 본인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이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맡은 일이, 아무리 월급쟁이라지만 내가 맡은 사업이 휘청거리는 모습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버거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한 순간에 회복될 일이 아니었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으니, 나라도 먼저 수습해야 했다. 결국 벌어진 일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은 내 몫이므로. 그래서 금요일 이른 오후에 사무실을 무작정 나섰고, 와이프에게 짐을 싸 달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와이프는 고맙게도 내 맘과 의도를 잘 알아차렸다. 장소를 정하지도 않은 채 우리는 아이들 학교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른 오후 3시 10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웃으며 우리에게 왔다.
얘들아, 우리 오늘 가족 여행 갈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웃으며 좋아했다. 물론, 놀라기도 했지만 여행에 대한 기대가 더 컸는지 모른다. 그리고 학교 끝나고 마냥 집으로 가는 일상에 변주를 주었으니 뭔가 새롭기도 했겠다.
아이들에게 가족 여행은 자동차를 오래 타는 지겨움도 있지만 맛있는 간식을 먹고 뒷자리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의 경험과 집이 아닌 호텔방에서의 낯선 설렘 속 잠자리라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남쪽을 향하는 고속도로를 택했다.
남쪽으로 가는 도로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지나 벨기에로 향할 수 있다. 좀 더 내려가면 프랑스 파리가 나오고 내려가다 왼편엔 독일이 자리 잡고 있다. 와이프와 짧은 상의를 한 끝에 그동안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자 했다. 그리고는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에서 파리 쪽 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언젠가 우리가 시간 나면 가보자 했던 노르망디 해변의 라인을 따라가는 코스로. 몇 개월 전부터 언제 한 번은 가보자 했던 코스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되니 기분이 좀 묘했다.
와이프는 분주했다. 호텔 예약부터 간략한 코스 계획까지. 이렇게 갑작스러운 요청에 아무 말 없이,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그저 따라주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아이들도 그저 웃으며 뒷자리에 앉아 가족여행에 들뜬 마음을 이리저리 표현하고 있었다. 고마운 녀석들. 고마운 우리 가족.
유럽에서의 운전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나 길게 뻗친 도로와 양 옆으로 갈라진 초록 들판에 듬성한 꽃들을 보면 그렇다. 긴 이동 시간에 와이프나 아이들이 잠든 그 시간은 더더욱. 적절한 외로움과 아무 생각 없이 직진만 하면 되는 무념무상의 그 시간에 생각의 크기와 깊이는 어느 때보다 크고 깊다. 내가 바란 여행은 이런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여행. 무언가를 그려볼 수 있는 여행.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에서 가족들이 새로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함께 추억을 남기는 그 시간이 난 너무나 좋다. 아무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왜 가야 하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함께 훌쩍 떠나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크나큰 위로가 된다. 즐거움이 되고 삶에 희망이, 버팀목이 되어준다.
와이프는 묵묵히 첫 번째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코끼리 절벽으로 유명한 곳. 화가인 모네가 사랑한 작은 도시이며 그의 많은 작품에 남겨졌다는 아름다운 마을. 와이프가 나와 아이들에게 우리가 갈 곳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읽어주는 동안, 나는 그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했다. 답답할 때 바다가 보고 싶은 건 틀에 박힌 공식 같으면서도, 결국 그 공식에 따라 답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오후 3시가 넘어 출발하여 도착한 작은 호텔의 그곳은 밤 11시에 가까웠다.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에 도착한 것이고, 국경 2개를 지나쳤으니 밤이 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호텔 문이 굳건히 잠겨있었다.
초인종을 몇 번 누르고, 인터폰으로 연결 시도를 여러 번 한 후에야 주인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앞에는 '영어 가능'이라는 안내 스티커가 있었지만 프랑스 호텔 주인과의 대화엔 생각보다 많은 바디랭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예약을 했더라도 체크인은 밤 10시까지만 가능하고, 오늘은 주인이 잠이 늦게 들어 운이 좋게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고. 야밤에 돈을 내며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그리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차에서 잘 뻔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으로 방을 향했다.
2층 철제 침대에서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지만, 화장실은 공용이라 복도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샤워실이 방안에 있긴 하다는 것. 불편함은 당연했지만 작은 마을에, 그리고 고요한 이곳에 제법 어울리는 작은 호텔이었다. 그저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그리고 아주 잠시 있다 갈 곳이라는 생각에 불편함은 참을 수 있었고, 오히려 낯선 이 작은 호텔 방과의 내일 아침 이별이 벌써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이 지나면, 그 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알기에.
늦은 밤. 고요한 불빛. 그래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피곤한 와중에도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