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기억이 가물하지만, 우리는 급변한 세상을 맞이했었습니다.그때를 돌아보면 그야말로 개벽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만나 얼굴을 맞대어 돌아가던 세상.
직접 맞대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만나지 말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모든 것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합니다. 역기능입니다. 정이 말라갑니다. 직접 만나서 해야 하는 일이 분명 있고, 그래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세상이 너무나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순기능은 그 불편에서 옵니다.
삶의 역설입니다. 불편한 게 편한 것으로 바뀝니다. 재택근무로 인해 지옥철을 타던 출근길은 거실에서 건넌방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됩니다. 불필요한 만남이 줄었습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는 만남도 있던 겁니다.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모든 변화 안엔 역설이 숨어 있고, 역설 안에선 또 다른 변화의 물결이 시작됩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오는 변화를 감지했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가족들도 저마다 각자의 비대면 약속으로 바빴던 기억이 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드디어 생겨난 겁니다. 자기 계발 관련 콘텐츠나 산업이 활발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 기회를 맞이하여 나 자신을 깊이 탐구하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둘 줄 아는 방법을 체득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자아적 거리두기'를 했던 겁니다.
'자아적 거리두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를 더 모르겠습니다.
그런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자아를 보는 겁니다.'메타인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나를 봐야 합니다.
그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꼭 그러해야 합니다.
글쓰기, 책 읽기, 명상 등.
알게 모르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보는 시간을 터득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자아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겁니다.
때론, 나와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글쓰기'입니다.
글을 쓰며 나도 모르는 저 심연 깊은 곳의 무의식을 꺼내어 놓고, 그것을 다른 '나'가 되어 읽어 내려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