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남의 삶을 엿보며 살고 있습니다.
21세기 불행의 근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타인의 삶을 동경하고 질투하며 또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내어 놓습니다.
그 삶은 마치 경매장에 나와 더 비싼 값으로 팔리려는 어느 물건과도 같아 보입니다. 더 예쁘게, 더 멋있게, 더 있어 보이게.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아우성치는 것처럼, 너와 나의 색감 보정과 있어 보이는 각도가 격돌합니다. 그 값어치는 구독과 공감, 좋아요로 환산됩니다. 수많은 반응을 얻고 마음은 풍족한데, 어째 삶은 저 뒤에 쓸쓸히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쪼그려 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삶을 맞다 틀리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삶과 내 삶은 같지 않지만 다르지 아니하며,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같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내 삶도 응당 있어 보여야 하며, 어느 한순간의 벅찬 감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하기도 해야 하니까요.
SNS가 인생의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오만함에 저는 반기를 듭니다. 사람에게는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배제한,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이기 때문이죠. '기록'과 '표현' 그리고 '전달'은 역사적으로도 행해졌던 것이고, 지금 우리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역사를 쓰고 있을 뿐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그것의 역사와 지금의 SNS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브런치로 엿보는 타인의 삶은 좀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브런치엔 소위 말해 '있어빌리티'가 덜합니다. 어쩐지 브런치에선 모두가 솔직해지는 모양새란 생각이 듭니다. SNS에선 가면에 가면을 쓰고, 보정까지 해가며 무언가를 포장하려 한다면. 브런치에선 모두가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냅니다. 밤새 취해있던 숙취를 토해내는 것처럼. 있어 보이게, 화려하게 치장했던 그 순간이 어지러워 속 안의 모든 걸 브런치에 쏟아내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SNS엔 절망이 없는데,
브런치엔 절망도 있다.
정말입니다.
SNS에선 돈이 없어도 어쩌다 한 번 먹은 소고기는 대서특필되죠. 대서특필된 피드는 사람들을 끌어 모읍니다. 모인 사람들은 공감을 주고, 그 공감을 약으로 삼아 어느 일정 기간을 버팁니다. SNS엔 퇴사나 고용불안,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같은 절망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하는 겁니다. (유토피아. 그러니까 어차피 디스토피아인 현실에서는 이러한 곳도 있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렴. 그래야 하죠.)
그러나 브런치엔 절망의 내용들이 상당합니다.
백수가 되어 잠시 기쁘다가, 이내 몰려오는 불안감을 호소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정서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사랑과 결혼만이 있는 게 아니라 이혼도 있고, 늙어감에 대한 서글픔과 서러움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과 주위를 포장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내어 놓습니다. 단전부터 끓어오르는 천불을, 이리저리 요동하는 명치로부터의 울컥함을. 살아보니 뭔가 억울한 삶에 대한 배신감을 속속들이 쏟아 놓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곳 브런치가 좋습니다.
SNS로 보는 유토피아도 좋지만, 브런치에서 보는 우리네 현실도 좋습니다. 물론, 브런치에도 유토피아적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미지와 짧은 글은 삶을 미화하지만, 좀 더 길게 서야 하는 브런치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집니다.
희망과 절망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정도의 개념이자 상호 보완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에 절망이 있는. 둘 중 하나만 고르려 할 때 삶은 비극이 된다는 걸 살아오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계속해서 희망과 절망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 쓸 것이고, 다른 사람의 절망과 희망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삶을 계속해서 엿보려 합니다.
[종합 정보]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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