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 스스로를 증명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당신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당신은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좋다. 존재한다고 치자. 존재의 근거는 무엇인가. 데카르트의 말을 빌려 생각하고 있음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네 존재는 한낱 '생각'의 유무에 따라 '존재'의 유무가 갈리는 것인가? 치매에 걸려 자신의 생각을 가늠하지 못하고, 지난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생각하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를 만져봄으로써 우리는 그를 존재한다고 결론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촉감은 믿을 수 있는가? 촉감을 넘어 오감으로 그 범위를 확대한다 한들, 그 모든 게 실상이며 실상으로부터 오는 기분과 느낌이 우리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생각함으로써 존재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분법은 존재에 대한 무궁무진한 의문을 덮어버리는 일시방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삶은 왜 허무함 그 자체일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는데, 죽음 이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영면 이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다. 일시적으로 심정지가 일어나 죽음의 문턱 앞에 갔던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사후세계나 그다음의 삶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나 일시적인 시신경계의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말해 정말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죽음 이후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기억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 존재함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허무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무존재=허무함을 증명한다. 죽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고?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모르겠으면 당장 잠들어 보라. 주말 오후. 아주 깊은 단잠에 빠져 보라. 잠에 들었을 때 스스로를 기억하는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존재가 없어졌다는 걸 실감한다. 그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 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을 통해 죽음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다. 꿈? 그것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겠냐고? 없다. 꿈이 온갖 거짓을 말해도 우리는 그 꿈에 속는다. 실제가 아닌 것에 식겁하기도 하고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가련하다. 실재가 아닌 것에도 그렇게 요동하는 사람의 정신이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온전하지 않은 생각도 생각이라 말하며 존재를 증명하려 할 텐가? 나는 못하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만 더 커질 뿐이다.
삶의 허무함은 정말 어디에서 오는가.
돌이켜보건대, 허무하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그것은 온다. 존재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것에서 허무함은 비롯된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허무함을 부정하려 하면서 삶의 괴리는 더 커지고 더 크고 많은 부조리를 마주하게 된다. 더더군다나 작금의 시대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소비'와 직결된다. 수많은 물건과 브랜드로 몸과 마음을 치장하려는 우리 자신을 떠올려보자. 당신의 존재를 고귀하게 해 준다는 말들은 당신의 지갑을 열기 위한 달콤한 속삭임일 뿐이다.
요동하는 삶에서 남은 건 대체 무엇인가. 지금까지 당신이 열심히 살아오면서 손에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라. 그리고 죽음으로 삶을 승화할 때, 가져갈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기억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를 가늠해 보라.
어차피 삶은 허무한 것이다.
허무하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존재에 대한 확신이 옅어진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허무함 그 자체를 직시하는 연습과 능력이 필요하다. 죽음, 허무함, 존재의 공허함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삶은 고귀해진다. 우주의 먼지, 억겁년에 스쳐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 반짝임은 안타까운 허무함이 아니라 나름 의미 있는 허무함이 될 것이다.
다시.
삶의 허무함은 허무함을 부정하고, 존재를 강박적으로 증명하려는 허둥댐으로부터 온다. 삶은 허무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면 떨쳐버릴 수 있다. 허무함을 잠시 잊고, 존재의 반짝임을 만끽해야 한다.
돌고 돌아 결론을 말하겠다.
존재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없는 걸 증명하려 들지 말라.
증명하려 허무함을 부정하지 말라. 존재를 증명하려 하면 할수록 자아는 희미해질 것이고, 허무함을 부정하려 하면 헐수록 삶은 더 공허해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