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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07. 2024

처지에 대한 절망감이 들 때

<스테르담 철학관>

음식을 먹다 무언가를 흘렸다.

나는 당장 휴지를 꺼내어 그것을 닦았다. 하얀 휴지에 알록달록 얼룩이 생긴다. 그것은 내 손에 의해 이리저리 구겨져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갑자기 휴지 입장이 되어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휴지는 만들어질 때 자신의 용도를 알지 못한다.

하얗고 순결하게 가공되는 것이, 마치 우리네 삶을 닮았다. 휴지가 만들어지는 것과 아기로 태어나는 걸 연관 지어 보자. 태어남은 그렇게 고결하고 순결하다. 그러다, 세상에 나오게 되면서 그것엔 갖가지 얼룩이 묻힐 운명과 필연에 놓인다. 휴지도, 사람도.


휴지의 용도는 사람이 정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용도를 정하는 건 사람이라기보단 상황이다. 어떤 휴지는 지저분한 걸 닦고, 또 어떤 휴지는 아예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휴지라면, 고상하게 사용되어 사라지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의 뒤를 닦는 일을 하는 것보단, 예술 작품이 되거나 가능한 얼룩을 덜 묻히고 사라지는 편을 바라지 않을까.


사람도 마찬가지.

이왕 태어났다면, 고상한 삶을 살다 가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굽신거리며 조아리고 싶지 않고, 돈에 아쉽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 떵떵거리며 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게 모두의 꿈이 아닐까. 사람의 용도 또한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정해진다. 휴지와 우리 간의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겐 휴지보다는 좀 더 많은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휴지가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은 그 방향을 틀 수 있다. 부잣집 휴지든, 가난한 집 휴지든 모두 지저분한 걸 닦고 쓰레기통으로 향해야 한다는 운명은 같고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가족을 선택하여 태어날 순 없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는 그 정도를 바꿀 수 있다.


처지에 대한 절망이 들 때.

나는 왜 더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나지 못했는지. 나는 왜 더 똑똑한 사람이 되지 못했는지. 삶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한탄이 나올 때, 그래서 난 휴지를 떠올린다. 어차피 쓰레기통으로 향할 운명, 어차피 죽음으로 귀결될 운명. 동병상련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내 속의 자유의지를 떠올린다. 더더군다나, 휴지는 일회용이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않다. 약 100년의 삶을 일회용이라 규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더러운 걸 경험하고도 다시 삶을 이어가는 나 자신을 보면 그 수명은 휴지보다는 길다는 결론이다. 회복하든, 빨든, 씻어버리든. 다친 마음을 안고도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이 지속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나는 그 원동력을 '자유 의지'라고 규정한다. 휴지와 사람의 가장 큰 차이. 처지를 한탄할 수 조차 없는 존재와, 처리를 긍정하거나 비관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항할 줄 아는 존재의 차이. 자유 의지는 자유롭지 않은, 삶에 대한 유일한 반항법이자 자유롭지 않은 존재의 가장 자유로운 생존 기제다.


처지에 대한 절망이 들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절망감이 '자유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절망에 멈춰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스스로를 무언가 지저분한 걸 닦아 쓰레기통으로 부리는 휴지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다. 휴지와 같이 어떤 용도와 쓸모가 될진 모를 운명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자유 의지를 떠올린다면 우리 삶을 쓰레기통에 처넣을 일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좋은 처지를 부러워할 시간은 이미 다 써버렸다.

더 나은 처지를 만들어 갈, 자유 의지에 온 힘을 쏟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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