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틸과 미틸이 찾아 나선 파랑새가 결국 자신들의 새장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틸틸과 미틸이 요정과 함께 찾아 헤맨 곳이 바로 추억과 미래의 나라였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동화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이 이야기는 연극을 위한 희곡이었고 굳이 장르를 따진다면 '몽상극'이라고 합니다. '몽상극'이었기에 아마도 그렇게 추억과 미래의 나라를 자유롭게 다녀온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있습니다.
즉, '현실극'이라는 장르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장르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소스라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우리 주위에 요정이 없는 이유입니다.
추억과 미래의 나라를 다녀온 틸틸과 미틸이 파랑새를 찾은 건 '현재'였습니다.
행복은 손이 미치지 않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이에, 그러니까 현재에 그것이 있다는 걸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마주했던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시금 제 주위 것들을 돌아봅니다.
과거의 내가 어땠었든, 미래의 내가 어찌 될 것이든. 지금 숨 쉬고 있는 나를 그저 느끼려 노력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해야 우리는 온전히 '현실극'이라는 장르를 잘 살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서 우리는 추억으로 위로받고 실수했던 것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꿈꾸며 동기부여를 받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희망을 얻기도 하죠. 그러나 이것도 되새겨보면 결국 현실의 내가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저는 초심을 자주 잃습니다.
초심을 잃은 자에겐 여지없이 슬럼프나 번아웃이 찾아옵니다. 몽상극에선 주인공 주위에 요정이 날아다니는데, 현실에선 슬럼프와 번아웃이 마치 요정과 같이 내 주위를 서성입니다. 삼 년마다, 세 달마다, 삼주마다, 요즘은 삼일, 세 시간, 삼분마다 오는 슬럼프는 익숙해질 법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슬럼프라는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우리는 초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시제상으로 보면 초심은 과거에 있을 겁니다. '마음을 먹은' 것이 바로 초심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그러니까 추억의 나라로 떠나봅니다.
마음을 먹었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그래, 그랬었지...'라고 읊조려 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기억만 있고 감흥은 없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시간을 초월해서라도 초심을 찾고자 미래로 가봅니다. 그곳엔 '그래, 그래야지...'라는 다짐이 있습니다. 아쉽지만 그 또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움직여야 하는 건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현실극에선 내가 주인공입니다. 초심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나라는 마음 안에 파랑새가 있는 겁니다.
사실, 저는 틸틸과 미틸의 이야기가 '몽상극'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몽상극'의 탈을 쓴, 현실보다 더한 '현실극'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찾던 파랑새가 있는 곳이 현재였기에, 현재가 모든 몽상을 압도해 버린 것이니까요.
그 어렸을 때의 동화는 저에게, "꿈 깨!"라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으니, 몽상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말이죠. 몽상극의 가면을 쓴 현실극.
초심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그저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습니다. 초심은 현재 진행형인 겁니다.
그걸 알아차렸다면, 이제는 움직일 때입니다.
아, 물론 아직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그것부터 해야 하고요.
모든 분들의 초심을 응원합니다.
바로 지금 그 마음 안에 고이 접혀 있을. 아직 먹지 않았다면 어서 먹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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