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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25. 2016

[너를 만난 그곳] #24. 푸른 심장 Part 1.

저기 저 멀리 푸른 심장이 갑자기 붉게 보였다. 그리고는 두근 거렸다.

- 1 -


"잘 잤니?"


"응, 잘 잤어. 아저씨는?"


"응, 잘 잤어. 시차 적응 때문에 조금 힘들었지만. 새벽 네시면 항상 눈이 떠져. 네시에 눈이 떠져서 네덜란드인가?"


"......."


"미안해, 회사 사람들이 하는 농담인데 너한테 하니 역시나 반응이..."


이른 아침 오간 메신저.


- 2 -


어제 울었던 그 아이를 기억하며 조금은 웃어보라는 의도였다. 이제는 '아저씨' 말고 '아재'라고 불리겠지. 젠장. 말이 없을 정도로 허탈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어제 일을 잊고 다시 쾌활해지기를.


- 3 -


"오늘은 우리 어디서 보니?"


"푸른 심장이 있는 곳으로 와."


"그게 어딘데?"


"알아서 와. 찾아서 오면 상 줄게."


"그러지 말고 좀... 그냥 바로 말해줘."


"거기서 기다릴게. 메신저 이만 끝!."


- 4 -


'당돌한 거야 뭐야. 역시나 제 맘대로네. 더치 남자 친구와 왜 헤어졌는지 슬슬 감이 온다. 그나저나 '푸른 심장'이 있는 곳이 어딜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살을 잠시 더 감상하며 몸을 일으켰다. 기지재를 폈다. 온몸이, 온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 낮지만 시원한 탄식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푸른 심장의 그곳이 어딘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샤워를 하며 생각해보기로 했다.


- 5 -


여름이었지만 샤워하기 전 호텔의 욕실은 늘 서늘한 감이 있다. 물을 틀고는 찬 물에 화들짝. 언제나 속는다. 이내 따뜻한 물줄기들이 몸을 감싼다. 생각해 본다. '푸른 심장'이 뭘까? 그 아이가 짰던 계획서를 무심코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단어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오기가 발동했다. 검색을 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내 보고자.


- 6 -


'푸른 심장'이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스트루프 효과'가 떠올랐다. 스트루프 효과란 과제에 대한 반응 시간이 주의에 따라 달라지는 효과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빨강'이라는 글자를 읽을 때 글자의 색이 정말 '빨강'색으로 되어 있을 때보다 '노랑'색으로 쓰여 있을 경우 글자의 색을 말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말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앞에 붙은 푸른색의 상충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을 하고 있나. 하지만 푸른 심장이 무엇을 뜻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 7 -


메신저의 알람이 연신 울려댔다. 장소를 알아냈냐는 그 아이의 물음들이었다.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리 안 오냐는 재촉도 함께였다. 준비는 다 했는데 아직도 어딘지를 모르겠다. 물어볼 요량도 없었다. 아재의 고집이자 오기였다. 전화기를 놓았던 자리에 두툼한 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여찮게 그곳에서 푸른색을 보았다. 중국 청자와 비슷한 그 자태는 기이한 모양의 여러 주둥이들 사이로 튤립을 품고 있었다. 푸른색. 아, 델프트구나.


- 8 -


확신은 없었지만 길을 나섰다. 이번엔 차를 이용했다. 내비게이션에 델프트를 입력하고 목적지를 센트룸으로. 왠지 거기에 그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있을 것 같았다. 메신저의 알람은 연신 울려 대고 있었다. 40여분이 지나 델프트 시내 어느 한 곳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도심 한가운데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주차장은 매우 좁았다. 벽 여기저기에 범 긁힌 흔적들이 각각 그 차들의 색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차장을 나와 좁은 골목을 걸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저기 드높은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저기로 가면 될 것 같았다. 날씨는 좋았다. 기분이 좋을 만큼. 주차장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게 지나친 길을 되뇌다 저 앞의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정확히 100미터 전. 물론, 그 아이의 뒤편엔 푸른 심장이 있었다. 델프트의 상징과 같은 조각상이었다.


-9 -


백여 미터를 남겨 두고 그 아이가 나를 보았다. 어? 갑자기 그 아이가 달려온다. 뭐지? 그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뒷걸음쳐 도망갈 뻔했다. 하지만 지금 그 아이를 외면하며 안된단 생각이 순간 들었다. 나도 모르게 팔을 벌렸다. 말을 하다 말을 더듬는 것처럼, 내 팔도 더듬거리며 펼쳐졌다. 그 아이가 품에 안겼다. 나를 꼬옥 안는다. 무언가 부딪친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저 꼬옥 무언가 들어온 느낌. 저기 저 멀리 푸른 심장이 갑자기 붉게 보였다. 그리고는 두근 거렸다. 그 붉은, 아니 푸른 심장이.




Place Information


델프트의 푸른 심장이 있는 그곳. 두근 거리는 붉은 심장으로 다가 온 그 날의 그곳.

- Markt 85, 2611, Delft,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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