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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1. 2024

제 존재를 잊는 존재를 용서해도 되는가

<스테르담 철학관>

철학의 근본은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로 세상이 가득했다면, 철학은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존재하기에 물음을 떠올린다. 질문 속에 답은 없지만, 답이 없는 질문으로 또 하루를 영속해 간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이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 구조'란 용어를 언급한다.

그는 '존재자의 존재구조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그는 '존재란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라고 설명한다. '던져져 있다.'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선험적이지 않고, 주체적이지 않은 말이다. 쉽게 말해, 항상 우리가 던지는 질문처럼 우리는 왜 태어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생겨난 존재의 의구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아는 사회문화적 맥락 바깥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세계를 벗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존재구조'를 묻는 것이다.


한 TV 프로에서 법륜 스님도 존재를 묻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했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상통한다. 태어났기 때문에 사회가 형성되고, 그곳에 속하는 것이며 어떠한 맥락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데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정욕구'나 '가슴 설레는 일을 찾는 것'이다. 무언가 잘 풀릴 때, '아, 살아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하거나 삶이 힘들 땐 '숨 좀 쉬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우리가 한 시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절대자의 설계이며, 존재의 영속성을 부여받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행위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생각보다 크다. 때로, 사람들은 '죽음'이 인간사의 가장 큰 형벌이자 두려움이라 말하지만, 어떤 이들은 존재의 부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죽음도 불사한다. 어느 한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신의 문구를 함부로 했을 때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하므로, 존재를 부정하거나 잊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간혹 스스로의 존재를 잊는다.

이러한 일은 생활 속에서 꽤 빈번히 일어난다. 질문을 해보겠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잠을 자는 사이 스스로를 내내 기억하는가? 아니다. 꿈꾸는 것을 두고 스스로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은 잠시 멈추자. 꿈속의 나는 무의식에 휘둘려 이미 주체성을 잃은 존재다. 꿈꾸는 날보다 그러하지 않은 날이 더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우리는 '자아의 블랙아웃' 시간을 분명 갖게 된다.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며, 자아를 잃어버리는 아주 무서운 순간이다. 만약, 잠에서 깨었는데, 자는 동안 자아의 존재를 잃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받는다면 어떡하지... 란 걱정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잃어 났는데, 내가 나가 아니라면? 아예 내가 아닌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잠과 더불어, 존재를 잊는 일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발생한다.

하이데거는 사회와 세계의 맥락에서 존재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대 사회에 이르러 우리네 삶은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과는 반대로 더 각박해지고 분주하다. 왜 사는지, 왜 먹는지, 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모른 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인지하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 존재라는 확신은 없다. 


제 존재를 잊는 존재를 용서해도 되는가.


나는 자문한다.

자면서, 분주한 삶을 살면서 희미해지는 존재에 대한 나의 잘못은 작지 아니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내 존재를 더 기억하고 안아줄 수 있는 것인가? 생각으로? 느낌으로? 감정으로? 쉽지 않다. 이것이 쉬웠다면 철학이란 줄기는 뻗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풀리지 않은 숙제이기에, 지금도 철학의 사상과 이념은 그 범위를 확대해 나아가고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훌륭한 사상과 이론이 내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철학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내 사상은 내가 세워야 한다.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의 생각과 이론은 그들의 것이다.

참고를 하고, 영감을 받되 그것들은 온전히 내 삶에 100% 이입될 수 없다. 그들의 삶과 내 삶, 그들의 존재와 나의 존재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과, 내가 던진 질문은 보편적으론 같아 보이지만 개개인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질문의 맥락과 온도와 습도는 결단코 다르다.


존재를 잊는 존재를 나는 용서한다.

존재는 연약하면서도 강하다. 또, 강하면서도 연약하다. 쉽게 잊히는 듯 하지만 영속하며, 영속하는 듯 하지만 한 번의 낮잠으로도 그 영속성이 깨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용서해야 하는 건,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그 존재를 꽉 안아 함께 존재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숨 쉬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가.

느끼고 있는가.


그걸로 됐다.

용서하고, 내내 존재하면 된다.

(알 수 없는) 존재의 이유를 찾기보단, 존재하기에 발생하는 것들에 마음을 열어 보자. 


'존재'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떠한 '맥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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