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철학관>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떳떳하지 못하다.
천하고 너절하다.
비굴함과 비열함의 풀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비굴하다, 너는 비열하다고 말하면 온 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 그 꼭대기를 터뜨려 화산이 분출하는 것처럼 화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나 스스로가 이러한 마음을 느낀다.
중요한 건,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이 내게 던진 말이 아니라서 일까? 아니다. 스스로 느끼는 '비굴함'과 '비열함'은 타인이 던진 그것들보다 충격이 더 세다. 남은 알지 못하는 비굴함과 비열함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는 더 무너지기 십상이며. 더불어 더 큰 감정의 요동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들켜 느껴지는 감정은, 자신에게 들켜 느껴지는 그것에 비추어 상당히 크지 않은 무엇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에게 들키는 모습은 스스로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부정적인 단어가 내게 대입되는 걸 나는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무엇이 긍정이고, 무엇이 부정인지가 헷갈린다. 삶에 있어 순도 100%의 긍정은 없고, 반대로 완전한 부정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착하고, 멋있고, 예쁘고, 고결한 삶을 추구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부정적이고 비굴하고, 비열한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긍정과 부정은 상대적인 것이며, 그 둘 중 하나를 완벽하게 추구할 수 없는 데에도 우리는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강압에 사로잡혀, 삶의 이면을 너그러이 보지 못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단어들이 내 삶에 개입되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좌절하는 습관은 그 누가 알려 준 것일까?
왜 항상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하는가.
왜 늘 멋있고 옳은 판단을 해야 한다고, 타인을 의식하며 내 삶을 괴롭히는가.
나는 비굴함과 비열함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때로 나는 누군가를 배신하고,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이익을 잠시 잊어야 할 때가 분명 있다. 나는 고결하고, 순수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들을 완벽히 이루어낼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인 것을. 사람인 것을. 아무리 깨끗하게 샤워를 해도, 우리 몸속엔 배변을 기다리고 있는 찌꺼기가 상당하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해야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인데. 배출되어 나온 것들에 손으로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는 그 자체가 역설이고, 거만함이다.
겁이 많아야 생존의 확률이 높다.
떳떳하지 못해야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다.
천해야 고귀함을 앙망할 수 있다.
너절해야 정돈된 자신을 추구할 수 있다.
비굴하다고, 비열하다고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자.
긍정 속에서 부정을 찾고, 부정에서 긍정을 찾아내자.
'공존(共存)'의 가치를 스스로 깨우칠 때.
세상은 적으로만 채워진 황량한 곳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며 긍정과 부정의 기운을 의도치 않게 서로 나누는 곳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내 잘못도.
네 잘못도.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없다.
[종합 정보]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소통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