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진짜 멕시코 이야기>
스페인어,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생각의 감옥
미국 LA, 라스베가스, 샌프란시스코, 나파밸리... 최근 들어 다양한 주(州)와 도시를 여행과 출장으로 다녀왔다.
재밌는 건, 그곳에서 난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더 많이 썼다는 것이다.
미국은 스페인어 사용자 수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국가다. 전년 기준으로 약 6천만 명의 스페인어 사용자가 거주하고 있고,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달한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주(州)는 텍사스,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뉴멕시코 그리고 애리조나 주 등이 있다.
도시로는 마이애미, 샌 안토니오, 로스앤젤레스, 휴스턴, 엘 파소 등이 있는데 이 중 마이애미 스페인어 사용자 인구는 70%에 달한다. 영어보다 스페인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다.'란 말을 했다.
그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라고 까지 말했다. 이론대로라면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를 구사하는 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것에 동의한다. '틀'은 깨는 게 아니라 넓혀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고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듣고 말하게 되면서 내 감옥의 지경은 좀 더 넓어졌다.
그래서, 일상에서 접하는 말들이 스페인어였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라곤 한다.
아니, 이것도 스페인어였어?
스페인어였는지 몰랐다가, '이것도 스페인어였어?'라고 반문하게 된 것 중 가장 놀라웠던 건 미국의 지명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스페인어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아오다가, 멕시코 해외 주재원 발령을 받고 6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마스터했다. 중남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던 나는, 사실 멕시코가 스페인어를 말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농담 중, 로스앤젤레스를 '에레이'라고 말하면 득달같이 혀를 굴려가며 '에레이 노... 잇츠 엘뤠이'라는 게 있다.
스페인어를 알고 나니, 'Los Angeles'라는 말의 'Los'에 주목하게 되었다. 'Los'는 스페인어에서 남성 복수를 나타내는 정관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Los Libros'는 '(그) 책들'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엘뤠이도? 그렇다면 LA는 'Los Angeles (로스 앙헬레스)'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LA의 명칭 변천을 보면 아래와 같다.
El Pueblo de Nuestra Señora la Reina de los Ángeles de Porciúncula (포르시운꿀라 천사들의 여왕 성모 마을)
El Pueblo de Los Ángeles (천사들의 마을)
Los Ángeles (천사들)
이는 1781년 9월 4일, 44명의 스페인 정착민들이 명명한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외에도, 미국에 있는 많은 도시들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되어 있다.
San Diego (샌디에이고): "성 디에고"라는 뜻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 "성 프란체스코"라는 뜻
Santa Fe (산타페): "거룩한 신앙"이라는 뜻
El Paso (엘 파소): "산길"이라는 뜻
Las Vegas (라스베이거스): "초원/ 광야(들)"이라는 뜻
Miami (마이애미) & Tucson (투손):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스페인어 발음으로 더 알려짐
우리가 흔히 접하는 브랜드에도 스페인어는 숨어 있다.
1983년 롯데칠성음료는 미국 델몬트 본사로부터 브랜드 라이선스를 들여와 자체 개발 생산을 했다. 7080 세대라면 친숙한, 사실 음료보다 병이 더 유명하여 국민 보리차 병으로 사용된 브랜드다.
자, 문득 'Del'이란 말에서 스페인어 Feeling을 느꼈다.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전치사인데, 정관사 'El'을 만나면 'Del'로 축약된다. 게다가, 뒤에 붙은 'Monte'는 스페인어로 '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Del Monte'는 'From the Mountain'이란 뜻이 된다. '산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란 말이다.
그저 미국 어느 지역이나, 사람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야 '델몬트'의 진정한 뜻을 (생각의 감옥을 넓혀가며) 알게 된 것이다.
추가) LG 냉장고 브랜드인 'Dios'는 '신', 게임이름인 'Diablo'는 '악마', 구두 브랜드 엘칸토는 'El Canto(노래)', '까사미아'는 'Casa Mia(내 집/ 우리 집)'이란 뜻의 스페인어다.
해변에 가면 필수인 것이 바로 '파라솔'이다.
파라솔도 스페인어에서 유래되었다. 'Parar'라는 단어는 '멈추다, 막다'란 말이고, 'Sol'은 '태양'을 뜻한다. 'Parasol'은 스페인어로 '빠라쏠'이라 발음한다.
우리가 먹는 '빵'은 'Pan(빤)'에서 유래되었다.
멕시코에서 커피를 시키려면 '커피'가 아니라 '까페'라 말한다.
즉, 'Café(까페)는 스페인어로 '커피'란 뜻이다. 아이스를 원한다면 '까페 프리오(차가운)', 뜨거운 커피를 원한다면 '까페 깔리엔떼(뜨거운)'이라 말하면 된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엘리뇨'와 '라니냐'란 말을 잘 알 것이다.
'엘리뇨'는 수온이 올라가는 현상이고, '라니냐'는 반대로 저수온 현상을 말한다. 놀랍게도 두 단어 모두 스페인어다. 'El Niño', '엘니뇨'는 '남자아이'란 뜻인데 이는 12월의 고수온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연관하여 아기 예수를 지칭하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La Niña'는 '여자아이'를 뜻한다.
더 많은 스페인어들이 우리 삶 도처에 널려있다.
알면서도, 모르고도 쓰는 단어들이 있다는 건 생각의 감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즐거움이다.
일상 속 스페인어를 하나 둘, 더 찾아내는 즐거움이 생겼다.
스페인어의 매력이 날로 높아진다.
멕시코의 주재 생활 중, 한 마디라도 더 스페인어를 말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의 감옥에서 이룰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