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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22. 2024

(자아를 위해) 텍스트로 회귀할 것

<스테르담 메타버스보다 에고버스>

알고리즘에 그만 이끌려 다닐 것


짧은 동영상으로 몇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버린 나는, 동영상 앱을 (지우지는 못하고) 휴대폰 첫 화면에서 몇 단계 뒤로 옮겼다.

습관처럼 동영상앱을 누르고 그것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쉽진 않다. 요즘은 검색마저 영상으로 하는 시대가 아닌가. 21세기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동영상앱을 멀리하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노력해야 한다. 백과사전의 모든 정보가 내 삶에 필요한 건 아니며, 정보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 정보보다는 오감을 자극하는 콘텐츠의 길로 빠질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알고리즘에 이끌려 다니는 건 더더욱 싫다.

누군가 정해놓은 로직에 따라, 나에게 달려드는 알고리즘을 보면 내가 이것을 좋아할 것이다... 란 추측으로 어느 무엇의 콘텐츠로 나를 안내하는데. 자칫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정말로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고, 나도 모르는 나를 아는 척하는 알고리즘의 행태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나는 알고리즘에 이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라. 알고리즘의 끝엔 언제나 결제창이 있지 않은가. 세상에 돈과 연관되지 않은 콘텐츠는 없다. 누군가에게 조회수와 내 시간을 바쳐 돈을 모아주고 있거나, 끝내 무언가를 사고, 소비함으로써 그 알고리즘이 끝난다는 걸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텍스트로의 회귀


그래서 나는 자아를 위해 텍스트로 회귀해야 함을 주장한다.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에, 텍스트는 덜 매력적이다.

글쓰기, 독서... 말만 해도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해서 지겹고, 지겨워서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동영상 앱을 멀리하며 회귀한 텍스트의 세계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텍스트는 지루하다. 왜? 느리니까. 활자를 읽으려면 집중해야 하고, 집중하려면 에너지가 소모되고, 에너지가 소모되면 힘들다. 나는 '소모'란 단어를 '투자'로 바꿔보기로 한다. 에너지를 들여, 시간과 정성을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한 관념이 바뀌게 된다. 대개, 동영상을 보는 건 '남는 시간'(이란 착각)이 아닌가. 남는 시간에 사람은 무언가를 투자하지 않는다. 스스로 의미 없는 시간이란 걸 인정하는 셈이다.


<생산자의 법칙>에서 제안한, '불편한 선택'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소비를 위한 모든 것엔 '불편한 선택'이 따르지 않는다. '불편한 선택'은 생산자의 수단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불편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분명 나에게 생산적인 무언가를 가져다준다. 즉, 불편한 선택을 하지 않고, 쉬운 선택을 일삼으면 우리는 소비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소파에 누워 짧은 동영상을 내내 보는 것만큼 쉬운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영어 'Text'의 어원은 라틴어의 'Textum'이다.

'직물'에서 유래한다. 엮다, 짜다, 만들다란 뜻이다. 직물은 지그재그 또는, 수직과 수평으로 엮여 천을 만들어낸다. 활자도 그렇다.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는 큰 의미를 나타내지 않지만, 이것이 엮이면 텍스트가 되고,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의 기분, 감정, 생각까지 표현해 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다.'라는 말을 했지만, 감옥에 있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하기 때문이며 생각 또한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텍스트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미디어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결국 미디어 또한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시각화한 것뿐이 아닌가. 그러니까, 텍스트 없는 미디어는 없으며, 미디어에 텍스트의 힘이 보태어지지 않으면 그러한 미디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된다.


다시, 텍스트로 회귀해야 한다.

읽고, 써야 한다. 쓰고, 읽어야 한다.




세상은 자아를 돌아보려는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다.

모두 속도와 소비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 것인가, 또 누군가의 지갑을 열게 할 것인가. 더 빨리, 더 많이... 이러한 아비규환 속 상실되는 건 우리네 '자아'다.


자아는 스스로 챙겨야 한다.

세상의 속도에 순응하되, 자신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대개, 세상의 속도에 그저 따라가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면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내가 안 하면 불안하니까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만다.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텍스트로 회귀하는 것이다.


결론은, 늘 그것이다.

알고리즘의 끝엔 결제창이, 텍스트의 끝엔 자아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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