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중년과 에세이>
나는 '머피'란 친구들 둔 적이 없는데, 그가 자꾸 나에게 친한 척할 때가 있다.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는데, 그러지 않던 엘리베이터가 층층이 선다거나.
몇 시간을 끙끙대며 완성한 보고서가 저장 버튼과 함께 멈춰 버리거나.
친구와 약속을 한 날이면 어김없이 상사와의 저녁식사가 갑자기 잡히거나.
'법칙'으로까지 승격된 그 친구는 영 반갑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내심, 나에게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된다는 속셈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러한 속셈은 점점 옅어진다.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날 줄 알았던 교통사고, 내 인생엔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지갑 분실 그리고 언제나 잘 나갈 거라 생각했던 직장에서 삐걱거림을 겪으면 서다.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어른의 과정이며, 얼마간의 우울함은 인생의 디폴트가 아닐까.
그러나 어두움의 이면엔 밝음도 있는 법.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란 없다'란 말을 살짝 뒤집어 본다.
나는 왜 좋지 않을 일에만 그 문장을 욱여넣었을까.
그 말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나는 왜 애써 외면했을까.
갑작스러운 초고속 승진이 뒤늦게 찾아올 수도 있고.
꾸준히 구매하는 로또가 드디어 6개의 숫자를 일치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나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란 없다'란 뜻은 양면의 가능성이기에.
나는 그것들을 그저 받아들이거나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제사 나는 잊고 있던 소중한 친구의 이름을 떠올린다.
알고 보니 내 옆에 항상 있어왔던 소중한 나의 '샐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