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에세이>
'불로초'는 말 그대로 '먹으면 늙지 않는다는 (상상의) 약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클로에파트라도 젊음과 영생을 위해 그들만의 방법으로 노력을 했고, 소설이나 동화 속에선 젊음을 얻기 위해 영혼도 바치는 주인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영원히 살고 싶지 않다. 죽지 않고 싶지 않다. 젊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 사그라드는 삶의 속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나는 간혹 살아 있는 게 비정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죽음은 나에게 아직 다다르지 않았을 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거란 건, 나도 알고 너도 안다.
동안이란 말을 듣고, 그 소리에 집착하여 어려 보이려 했던 날들이 있었다.
돌아보니, 그마만큼 추하고 부끄러운 때가 없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고 겉모습을 꾸미다 문득, '동안'이란 말 자체가 나이 든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얼굴의 뜨거움을 느꼈다. 다른 이의 시선에 대한 창피함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돌아볼 때 느낀, 나이에 걸맞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간혹, 우리는 서로 묻는다.
20대로 돌아가라면, 30대 또는 더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고. 내 대답엔 조건이 있다. 지금의 삶을 알고 간다면 돌아가겠다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 좋다고. 젊은은 필요 없다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 그 의미도, 소중함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불안할 뿐이다. '불안함'은 어느 하나의 '에너지'다. 혈기왕성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안정적이지 않다.
중년은 그에 비해 무언가 좀 더 안정적이다.
경제적인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닌 걸 아니다고 말하는 용기와 더불어, 아닌 것도 맞다고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삶의 부조리에 대항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도 한다. '받아들임'을 젊음은 비겁함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젊다고 느끼지 않을 그날에 이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다'를 생각하면 된다. 바다는 깨끗한 물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만가지 물을 다 받아들이지만, 바다는 바다이듯. 부조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나가 아닌 것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바다가 바다다워질 수 있는 건 받아들임의 미학 덕분이며, 이것은 자아에게도 통용된다.
불안하지만 생기 있는 젊음.
생기는 덜하지만 보다 안정적인 중년.
이 둘의 개념과 세대의 표상을 가르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그 둘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이 가지는 당연하고도 진리로운 깨달음을 나누자는 것이다. 젊음을 지나 중년에 이른 사람이라면 공감이 갈 것이다. 한편으론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만 어느 정도라도 있다는 걸 상기해 본다면 더더욱 더.
젊은은 언젠가 중년이 된다.
중년은 젊음으로 회귀하고 싶지 않다.
오늘은 내 가장 젊은 날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내 가장 늙은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어가고도 있는 존재이니까.
젊음과 바꾸고 싶은 중년의 깨달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시황이 찾았던 불로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아주 당연하고도 간단한 사실을 뒤로 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