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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19. 2016

가을이란 물감으로 그려본다 룩, 룩, 룩셈부르크

가을의 초입 룩셈부르크에서


- 여정 -

네덜란드 To 룩셈부르크 (404km, 1박)
룩셈부르크 To 벨기에 워털루 (212km)
벨기에 워털루 To 네덜란드 (220km)



"어머, 큰일 났네!"


토요일 오전 룩셈부르크로 향하던 차 안이었다. 출발한 지 30여분 되었던 것 같다. 갑자기 와이프가 알림을 받은 휴대폰을 꺼내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말 놀란 탄식 반, 그리고 내가 알아차리기를 바란 소리냄의 혼합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룩셈부르크 호텔이 취소 되었다네.

와이프가 힘없이 말했다. 내 눈을 바라보지 않고 이야기함을 운전을 하면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비행기도 아니고 호텔이 최소 되는 일이 있나?

순간 운전대를 돌려 갓길로 세워 자초지종을 들어야 할까 싶었다. 뒷자리 녀석들은 심심하던 차에 이게 무슨 일인가를 눈치 없이 알아내려 조잘조잘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 내가 날짜를 잘못 예약했어. 어제 예약하면서 어제 날짜를 체크인에 넣었네. 내가 왜 그랬을까.



"와이프에게로의 여행


황당 그 자체였다. 오늘 토요일, 주재원 회의가 없는 날인지라 급박하게 추진한 가족여행이긴 했다. 와이프는 그간 모든 가족여행의 여정과 할 일을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던 터라 나도 그저 맡겨놓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운전을 하며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온 불어와 영어 발음이 섞인 룩셈부르크의 남자 직원은 우리를 'No Show'로 규정했다. 환불이나 날짜 변경 가능성의 틈은 보이질 않았다. 물론, 잘 알고 있었다. 'No Show'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와이프가 날짜를 착각하여 오늘 해야 할 예약을 어제 했다는 건 나라도 받아줄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 짜증을 곧이 곧대로 분출하거나 표현하진 않았다. 그 짜증을 곱씹었다. 생기는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내뱉는다는 것이 부부 사이에 얼마나 큰 상처나 문제가 될 수 있는지 겪어봐서 잘 안다. 그리고 짜증이나 화를 곱씹으면 발생한 일에 대한 감정은 사그라들고 발생한 그 일에 다시 조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사실, 와이프와의 부부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욱하는 성질이 있는 나에 비해, 와이프는 내 얼굴 표정만 봐도 눈물을 흘리는 터라, 신혼 때부터 줄곧 싸움은 시작도 되지 못하고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왔었다. 드라마를 볼 때도 '이 정도 장면이면 와이프가 눈물을 흘리겠다.'라고 생각하고 돌아보면 와이프는 이미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정도다. 내 와이프는 그런 사람이다.


허공에 날아간 돈이 아깝긴 했지만 나도 그동안 내가 했던 실수를 생각하며 참았다. 아마 더 속상한 사람은 와이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책을 조금만 하도록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불어, 호텔은 같은 곳으로 다시 예약을 했다. 평소와 다른 와이프의 모습을 여행한 기분. 129유로가 들었다.

비싼(?) 호텔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룩셈부르크, 그 여름의 끝 자락"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도심에 주차를 했다. 사실, 룩셈부르크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공사 중인 아돌프 다리가 행여나 그 장막을 벗었을까 하는 기대도 룩셈부르크를 주말 가족 여행지로 삼은 이유 중 하나였다. 날씨는 더웠다. 여름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덥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은 조금만 걸어도 연신 물을 찾아댔다.

하늘은 맑았다. 여름 끝자락의 색과 더위였다.


주차장을 나와 도로가로 나가면 바로 헌법 광장이 보인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 거대한 탑에는 한 여인이 손에 누군가에 씌워 줄 무언가를 들고 있다. 그 모양이 역동적이어서 마치 광관객 한 명 한 명에 씌워줄 요량처럼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숙연해진다.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념물은 세계대전 당시 자진하여 전쟁에 참여한 수천 명의 룩셈부르크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동으로 세워진 꼭대기의 여인은 예상대로 승리의 여신 니케를 나타내며 두 손에 들린 월계관은 바로 그 희생정신 강한 군인들을 위한 것. 여름의 끝자락 구름과 햇살이 그 승리의 여신과 월계관을 위해 오늘 하루 조명을 자처한 듯하다.


오늘 하루 조명을 자처한 여름 끝자락의 햇살
월계관을 들고 있는 승리의 여신
하늘과 햇살이 기념물과 하나가 되어.


광장을 지나 잠시 지난번 아쉽게 발길을 돌렸던 아돌프 다리로 향한다. 룩셈부르크는 계곡과 절벽 사이에 위치한 터라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의 건축물이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아돌프 다리이기에 룩셈부르크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자동적으로 발길을 향하는 곳이다.


아쉽게도 아직 공사중인 아돌프다리. 3~5년은 걸릴 거라는 호텔 직원의 말.
아쉬움에 주변 곳곳에 시선을.


발길을 올드타운으로 돌렸다. 그곳에 위치한 올드타운 투어 기차를 타기 위함이었다. 가는 길에 위치한 커다란 교회가 발걸음을 끌어들인다. 룩셈부르크 대성당. 교회는 저마다의 매력과 색을 품고 있다. 그리고 펼쳐지는 모습. 들어가면 입구에 펼쳐진 저마다의 소원을 불 피우는 초와 화려한 스태인 글라스. 뒤편에 자리한 거대한 오르간의 자태. 그러한 웅장함의 거대함은 사람을 한낱 초라한 존재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회개하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게 한다. 절대자에 대한 무력감 일지 모른다. 교회는 그렇게 절대자의 자태를 품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의 소원. 저마다의 바람.
빛은 종교와 더불어 예술을 만들어낸다.
단상.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모이는 곳.
뒷편 웅장한 기둥과 오르간


조금은 수수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앞 뒤, 그리고 양 옆으로 화려한 장식과 그림 그리고 건축 기술로 에워싸여 있다. 드높은 천장. 인류를 위해 희생한 절대자의 모습과 이야기의 향연은 녀석들의 두 손도 모으게 한다. 가족을 위한 기도는 언제나 환영. 교회를 벗어나 옆에 위치한 분수가 여름의 끝자락을 달랜다. 함부로 시원하게.

여름의 끝자락. 함부로 시원하게.


"갑자기 다가온 가을,
가을이란 물감으로 그려가는 룩셈부르크"


신기한 건. 분수를 기점으로 기온의 변화가 급격해졌다는 것. 날씨는 무더웠지만 곳곳에서 보이던 노란색과 낙엽의, 가을이라는 신호들이 몸소 느껴졌다. 올드타운 초입으로 향하는 그곳이 그랬다. 그 어떤 시간과 계절의 경계를 건너는 느낌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그 길은 그래서 시원함과 서늘함의 공존이었다.


프라하의 언덕에서 바라 본 프라하는 붉은색의 알록달록한 지붕이 인상적이다. 다른 유럽의 어느 도시도 색채가 강한 색으로 그 아우라를 뽐내며 여러 관광객의 셔터에 담겨 간다. 그런데 룩셈부르크 올드 타운의 정수리는 독특한 색감이다. 검은색이나 짙은 회색이라고 표현하기엔 모자람이 있다. 꼭 색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철'과 같은 느낌의 그것이라는 것이 맞을 듯하다. 차가운 느낌이지만 왠지 견고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다가온다. 중세 시대의 무엇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무뚝뚝한 사람들이 살았을 거란 상상도 해보게 된다.


유네스코 지정 동판 저 아래 올드타운의 색채가 보인다.
작지만 첨예한 저 첨탑이 어쩌면 룩셈부르크의 상징일지도.
절벽 아래 고즈넉함. 그 옛날 참으로 안전하고 한적한 곳이었으리라.


여행을 하다 만나는 날씨는 어느 여행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햇살이 좋아서, 비가 와서, 구름이 많아서 나름의 색채와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중에서 '해를 품은 구름'을 좋아한다. 자동적으로 카메라를 갖다 댄다. 살아가며 직시할 없는 두 가지. 죽음 그리고 태양. 구름이 해를 품으면 태양이 있는 곳을 직시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새어 나오는 그 빛은 언제나 진리다. 사물은 잠시 실루엣을 갖게 되고 하늘의 색은 또렷하며, 구름은 해를 등에 업고 오묘하게 빛난다. 그 순간이 좋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걱정도 멈춘 듯.

해를 품은 구름. 참으로 멋지다. 참으로 좋다.
절벽과 절벽을 잇는 여기 저기의 다리. 바로 룩셈부르크의 매력.
사랑의 자물쇠는 그들에게 축복일까 족쇄일까. 변치말자는 그 다짐. 서로에게 행복이기를.


올드 타운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여느 도시라면 사람들로 북적일 그곳이 정말 한적하다. 그래서 상권이 발생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상권이 발생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없는 것인지. 초입에 위치한 몇몇 식당이 맥주와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을 뿐이다. 딱 거기까지다. 어쩌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유도한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대부분이다. 관광지지만 뼛속까지 개발해 놓진 않았다.


초입에 위치한 조그마한 다리. 그리고 올드타운으로 이어지는 그곳의 모습은 마치 독일 몬샤우와 같았다. 마치, 데자뷰를 보는 듯했다. 양이 적은 물과 독특하게 생긴 집의 수가 몇 개 차이가 나는 것 외엔 구별하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골목골목까지 관광 기차를 다녀본 그 느낌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여기, 이 마을은 유명한 것 치고는 매우 조용했다. 관광객도, 사는 주민들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정수리의 색채와 느낌이 독특한 이곳의 속속은, 렇게 그런식으로 새로웠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돌바닥과 낯선 문양의 건물들. 그리고 하늘에 펼쳐진 구름과 햇살만이 그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리막 끝 올드타운 입구.
올드타운으로 이어지는 다리. 독일 몬샤우를 연상케한다.
룩셈부르크는 높낮이가 다양한 곳이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반나절은 여름이었고, 반나절은 가을이었다. 하루 만에 계절이 바뀐 건지, 계절이 바뀌는 그즈음에 여행을 온 것인지. 와이프의 호텔 예약 실수로 시작된 이 가족 여행은 언제나처럼 기억에 남을 것이다. 와이프의 말을 들어 손해 본 적이 없다. 이 날도 어쩐지 와이프가 주차장 근처의 광장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었다. 올드타운 초입에서 먹고 싶었지만 마침 주방도 문을 닫았다 하여 다시 도심으로 이동.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오르며 난리다. 그래도 와이프의 의견대로 그곳에서 밥을 먹기로 한 우리는 마침내 도심 주차장 근처에 자리를 잡고 허기진 배가 원하는 메뉴를 시켰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 그냥 스쳐갈 비가 아니었다. 가을을 동반한 비였다. 쌀쌀했고 바람도 제법 불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고 햇살이 밝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는 추적추적 가을을 흩뿌렸다. 기온이 급강하했고, 테라스에서 밥을 먹던 우리도 그 을씨년스러움에 움찔했다. 와이프 말을 듣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올드타운 초입에서 밥을 먹었으면 우린 아마 비를 쫄딱 맞고 20여분을 걸어야 했을 거다. 호텔 예약의 실수가 용서(?)되는 순간. 그렇게 나는 와이프와 서로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 여행을 해간다. 가족이라는 여행을.




테라스 식당에서 시켰던 콜라. 펩시나 코카콜라가 나올 줄 알았는데.

콜라가 말한다. "어서 와, 나 같은 콜라는 처음이지?"

여행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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