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Sep 13. 2016

고사리 손의 습격

오늘도 난 '가족이라는 여행을'

기분이 이상했다.

나이가 드니 감이 온다. 왠지 오늘은 아플 것 같다는. 퇴근 얼마 안 남은 시점에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퇴근을 했다. 다행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업무용 노트북을 엎을 땐 물론 미결된 많은 메일들이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납기라는 무언의 압박에 굴복하여 하나하나 열어 봤을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그 펜딩 메일들을 그저 내버려두지 않곤 한다. 빨리, 정학하게 회신해야 내 존재 자체를 보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틀린 말은 아니다. 직장인이라면 그래야 하니까. 내가 같이 일하는 상대방도 그러하길 원하니까. 다행히도 난 복 받은 경우다. 일이 바빠도 아프다고 하면 주위 동료들은 이해를 해준다. 선후배들도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주재원의 삶이 척박함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폭탄급 이슈가 없어서 생겨난 서로 간의 여유일지 모른다.


집에 와서 쓰러졌다.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런 날이 있다. 정말 잠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잠시 뒤 눈을 떴다. 집은 여전히 고요했다. 추웠다. 몸살이란 녀석이다. 나이가 드니 속수무책이다. 그리고 더 이상 몸의 병이 아니다. 나이 + 몸살은 마음을 서럽게 하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그 무엇이다. 요전 주말까지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수영장에서 아이들을 이리저리 던져 주었던 나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내가 아마 헤라클레쓰일거다. 나중에 자라면, 너희들의 키가 아빠보다 클 거라고 해도 도통 믿지를 않는다. 하긴, 안 믿기겠지. 지금은 내가 가장 큰 산일 테니.


고사리 손의 습격

2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다. 조금 소란한 녀석들의 소리가 들린다. 방과 후 학교를 마치고 온 녀석들. 와이프에게는 아파서 좀 누워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던 터다. 들어오자마자 손과 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녀석들은 나에게 달려왔다. 


아빠 아파요?

첫째 녀석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둘째 녀석은 아직 사태 파악이 안되었다. 왠지 서러웠다. 어린아이가 되고 싶었다. 그 즉시, 난 와이프의 첫 째 아들이 되어 있었다. 평소에 아이들이 아프면 열도 바로 재어 주면서 나는 왜 안 재어 주냐고 툴툴댔다. 그럴 경우 와이프의 첫째 아들 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결국 체온계를 가지고 온다. 40도를 웃돈다. 아픈 것이 증명되었다. 이젠, 맘 놓고 아픈 척을 해도 좋다. 온몸은 열이 났지만 으슬으슬 추웠다. 아이들에게도 아픈 티를 냈다. 얼마나 공감할지 궁금했다. 보통 아들들은 공감능력이 떨어져 엄마나 아파가 아빠도 멀뚱멀뚱한다는 는 어느 교육 방송의 실험을 봤던 것이 떠올랐다.


춥다는 말에 첫째 녀석이 내 몸을 온몸으로 덮는다. 평소에 장난치던 아빠 이불 놀이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올라가면 아빠 이불. 아래로 가면 아빠 침대. 그러면서 첫째 녀석이 그 고사리 손으로 온몸을 비벼댄다. 춥지 말라고. 고사리 손의 어원은 잘 모른다. 그리고 왜 아이들 손을 고사리에 비유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이렇게 고사리만 한 손이 되었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잠시였다. 보통 어린이들은 지극정성으로 끝까지 하진 않는다. 그래도 녀석의 고사리 손 습격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둘째 녀석도 사태 파악을 하고는 내 몸 이곳저곳을 올라 발로 밟아 준다. 보통 내가 엎드려 있고 시원하게 마사지를 해달라면서 좀 밟아달라고 하던 게 기억이 났나 보다. 바로 눕지 않았었다는 것이 함정. 다리 관절이 꺾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스쳐간 녀석들의 습격과 손길은, 월급이 통장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지나갔다. 아픈 몸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행복했다. 마음으로 웃었다. 어쩌면 평생 하는 효도를 이때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녀석들을 키워내고 결혼까지 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무겁고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래도 좋다, 무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자화상일까? 아빠들의 인생일까? 그래도 행복한 이 순간을 고이 간직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빠, 돌아가지 마요.

바로 요 전 주말.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 할아버지는 아빠 몇 살 때 돌아가셨냐고 묻는다. 둘째 녀석의 질문이었다. '돌아가시다'란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게 기특했다. 그리고 그 뜻이 '죽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빠는 어렸을 때 아빠의 아빠가 돌아가셔서 아빠 없이 자랐어요." 이 말을 아이들이 기억한 거다. 아이들이 나를 동정한다. 힘들었겠다... 터닝 메카드도 못 사고,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아이들도 뭔가를 아는 눈치다. 그러면서 죽지 말란다. 아빠 돌아가는 거 싫단다. 보통 사람은 100살 전후로 죽는다는 말을 하려다 목에서 움켜 잡았다. 그래서 그냥, 그래 안 죽을게. 안 돌아갈게...라고 말을 흐렸다. 마음이 흔들리며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잠시 그 순간 나의 어린 시절을 여행했다. 나도 나와 같은 아빠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좋아지고 나빠지고를 떠나서 그냥 궁금했다. 여행을 하다가 그때 거기를 가봤으면, 거기서 무얼 했었으면 어땠을까... 정도의 것이었다.




결핍으로 인한 상처는, 다행히 아이들을 한 번 더 안아주고 더 사랑해주는 기재로 작용했다. 아마 어머니의 따뜻한 교육과 긍정적인 마음이 그러한 내 모습의 8할일 것이다. 요즘은 아빠가 있어도 경제적으로 잘나지 않으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다. 돈 버는 기계. 무얼 위해 고생하는지 모르다 정신 차려보면 가족은 없다. 뒤를 봐도, 옆을 봐도. 무언가 느껴지는 무게. 가족들은 내 목과 등에 올라타 저마다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나를 못 보는 눈치다. 이건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고생하신 어머니의 상황보다 내 앞길에 신경을 더 많이 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사랑한다'라는 말을 그리 자주 내뱉진 않는다. 


가족을 여행이라 일삼는 나는 그렇다. 어렸을 때 가족과 여행이 내게는 없던 것들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는데, 같이 사는 사람들과의 부대낌과 알아감은 그래서 또 하나의 여행이라 생각한다. 첫째 녀석과 둘째 녀석, 그리고 와이프를 알아가는 여행. 길게 살아보며 잠시 스치듯 여행할 때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오랜만에 다시 간 그 여행지가 무엇 하나라도 바뀌어 있는 것처럼, 오랜만에 만나 뵌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많이 변해계신다. 요즘 들어 더 그렇다. 그 시간이 빨라진다.


어쩌면 나도 어머니께 고사리 손으로 습격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느낀 그것을 아주 오래전에 느끼셨을 거다. 기억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속엔 분명 어딘가에 그 기억과 감동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프면 별 것 가지고 감성적이 된다. 아이들에게도 크려고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나도 아직 더 커야 하나보다. 다 크지 않았다. 남편이라는, 아빠라는 타이틀이 생겼을 뿐. 오늘은 그렇게 고사리 손에 취해, 와이프의 첫째 아들이 되어 깊은 잠에 들고 싶다. 사실, 그냥 그러면 된다. 가족이라는 여행이 감사한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의 '두물머리' 코블렌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