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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25. 2016

가로로 자라는 아이들

그렇게 행복을 찾아간다. 알아 간다.

퇴근


업무와 삶의 밸런스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그 탓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된다. 때로는 회사의 과한 요구가. 또 어떤 땐 나의 무능함이 발목을 잡는다. 물론, 열정과 보람으로 인해 자진해서 퇴근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있다. 자존심이나 오기도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어찌 되었건 저녁 어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제 가봐야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회사 건물을 나설 때의 공기가 낯설고 외로운 그때는.


도착


역시나 집에 불은 꺼져있다. 와이프는 아이들을 재우다 같이 잠들어 있다. 이해가 된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일정에 따라 움직인 그 가련한 몸은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결혼 전엔 도통 보지 못하던 자세다. 자기 위해 누운 자세가 아니라, 잠들 것을 예상치 못한 몸사위. 그 몸사위 그대로. 그렇게 누워 잠든 것이다.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교육. 그리고 두 아들과의 아웅다웅은 전쟁이었을 거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


아이들은 꿈나라로 여행 중이다. 첫째 녀석의 자세가 어쩐지 하늘을 날아 걸아가는 그것이다. 둘째 녀석은 옆으로 누워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춥지나 않을까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제 멋대로 향한 방향을 바로 잡아준다. 머리를 쓰다듬는다. 눈썹을 어루만지고 볼을 토닥인다. 참 부드럽다. 난 이 느낌이 좋다. 바로 잡아 누운 녀석들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더 길어 보인다. 서 있을 때보다 더 길어 보인다. 기분 탓일까. 내가 보지 못할 때 더 크는 것 같다. 가로로 키를 재본다.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참 많이 컸다. 녀석들. 아빠가 바쁘니 아이들은 가로로 자란다.


가족


다시 아침. 어제 보지 못한 녀석들을 만나는 시간. 그나마 아침이라도 만나니 참 좋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녀석들은 부산하다. 가련하게 잠들었던 와이프는 이제 다시 두 아들을 키우는 철의 여인이 되어 있다.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며 익숙한 호령으로 아이들에게 양치와 세수를 시킨다. 녀석들은 제법 신속하다. 호령에 씩씩하게 잘 따른다. 내가 일어나면 아이들이 달려온다. 요전 언젠가부터 나와 마주서 키를 재곤 했다. 둘째 녀석은 내 배꼽과 가슴 중간. 첫째 녀석은 내 가슴에서 약 3센티 정도 더 크다. 이렇게 아침엔 세로로 키를 잰다. 그래도 어쩐지 세로보다는 가로로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행복


나는 일 하는 사무실에 가족사진을 놓지 않는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을 생각하며 참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때문에 꾸역꾸역 참는 것이 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 우리 가족 각자가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이 모여 우리 가족의 행복이 될 것이다. 직장에서 힘든 일은 나의 몫이다. 가족을 위해 더럽고 치사해도 참는 것이 아니라, 나의 꿈과 나의 비전을 위해 참는 것이다. 더 큰 비전이 있고 참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래도 된다. 나는 오히려 가족을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은 억울하고 더럽고 치사해도, 그것을 오롯이 나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나를 위해 참는다. 가로로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에 조금은 덜 미안한 이유다. 덜 비참하고 덜 안쓰러운 이유다.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잠든 아이들. 제 멋대로 향해 마치 몇 시 몇 분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은 아이들을 바로 눕히는 그 순간.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토닥이는 그때. 잠시지만 진하게 행복을 느낀다. 가로로 자라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상처 난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행복을 찾아간다. 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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