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Oct 15. 2016

사랑의 언어

가족이라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그것

가족의 탄생은 에로스에 기반한다.


남녀가 서로 만나 느끼는 강한 이끌림. 정서적 감정과 육체를 향한 탐욕은 적절하게 혼합되어 마침내 가족을 이루는 씨앗이 된다. 물론, 모든 가족이 이렇게 탄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를 보면 대게 이렇다. 짧고 긴 연애의 기간에는 사랑이 유희적이기도, 소유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실용적이기도 하다. 1973년 한 심리학자가 나열한 사랑의 종류 중 몇 가지는 현대시대의 '밀당'이라는 한 단어로 간단히 정리돼버린다. 이러한 사랑이 열정적으로 달구어질 때까지 나타나는 사랑의 언어는 뜨거워야 한다. 달궈야 하니까. 정점이 어딘지 모를 그곳을 향해 달궈야 하는 온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뜨거움이 가족을 이루는 잣대가 되지는 않는다. 뜨거워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뜨거움 대신 다른 무언가를 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세상엔 변수와 조건이 너무나도 많고, 또 널려있다. 그럼에도 온도의 차이일 뿐, 그 사랑의 온도가 뜨거워야 함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뜨거운 사랑의 언어는 야릇하다. 보고 싶다는 말부터 안고 싶다는 표현, 말로만이 아니라 육체를 동원한 이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언어는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그리고 그 어색함.


새로운 것과의 만남은 늘 어색하다. 물론, 새로움에 기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것'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가끔 사람들은 소중한 무엇, 예를 들어 입양한 애완견이라던가 몇 개월 할부를 통해 어렵게 구매한 희귀 아이템 등을 '가족'에 비유하긴 하지만 정말 사람이라는 존재가 태어나 '가족'을 이루어냈을 땐 그 충격과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실, 사랑으로 합쳐진 두 남녀만의 기간엔 '가족'이란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저 시간이 늦어도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성과 알콩달콩함이 연속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핑크빛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새로 태어난 '전혀 인격적이지 않은 인격체'와의 만남은 가히 그 어색함이 충격적이다. 물론, 그 충격은 태어나기 전부터 전해져 온다. 아름다운 여자의 콜라병 같은 몸매를 배불뚝이로 만들고, 아직도 남아 있는 에로스를 억눌러야 하는 남자들은 대게 강제적 금욕에 처한다. 어쩌면 '가족'의 탄생이라는 대변혁에 앞서 준비해야 하는 일종의 '부모 훈련'이라 해도 좋다. 서로의 에로스는 잠시 잊고, 앞서 언급한 '전혀 인격적이지 않은 인격체'를 돌봐야 하니까. 충격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한 이 어색함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새로운 탄생이 가져온 결과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역할을 바꾸고 삶의 방식도 변하게 한다. 사랑의 온도와 사랑의 언어, 그리고 사랑의 빛깔도 갑자기 바뀌게 된다. 핑크빛 기류는 온데간데없다. 에로스의 남녀가 아가페의 부모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순간. 아이가 태어나면 남녀도 다시 태어나게 된다. 지나친 어색함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사랑의 온도는 변함없다. 아니 더 올라간다.


그렇게 한 때는 사랑이란 에로스뿐이라며 울부짖던 한 사내는 '아빠'라는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자신을 치장하고 액세서리를 사모으던 한 여인은 아이들의 희귀 템을 찾아 나선다.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사내의 모습도, 헌 신은 쳐다도 보지 않던 여인이 헌신을 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린다. '가족'이라는 곳에서 '부모'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여서 무언가 보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신이 아닌 이상 급부가 없으면 보람을 느낄 새는 없다. 다만, 부모가 되면 그 '급부'에 지나칠 만큼 관대해진다. 아이의 웃음에, 의미 없이 내뱉는 혀 짧은 말투 하나에 감동하여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사랑의 언어가 바뀌게 되었다. 자신의 여인에게서 느끼던 달콤했던 향기에 취해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뜨거웠던 언어는 온데간데없다. 에로스로 범벅이 된 사랑 한다고 내뱉는 언어는 사라진 지 오래. 사내는 이른 새벽잠에서 깨었을 때 아이들과의 전쟁에 지친 사내의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는 이불 매무새를 확인한다. 아이들 방으로 향한다. 혹시 춥진 않을까 이불을 걷어찬 아이들의 자세를 바로잡고 온 몸을 이불로 정성스레 덮는다. 사랑이 변했다. 더 정확히 말해 사랑의 온도와 언어가 변했다. 흔히들 사랑이 변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 받아들인다. 솔직히 처음엔 두려웠다. 변해야 하는 모든 이유를 온몸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사랑의 언아가 바뀌었을지언정, 그 온도는 더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떤 변화를 안게 될까. 가족이기에 거치고 겪어야 할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가족은 여행과 같을지 모른다. 자라나는 녀석들을 탐구해야 하고, 그 녀석들의 내면 속으로 짧고 긴 여행을 해야 한다. 녀석들도 부모의 인생을 직시해야 하며 부모이기 이전에 에로스로 만난 선남선녀임을 알아가야 한다. 더불어, 우리 가족이라는 여행을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여행, 즉 다른 가족을 만들어 이끌어가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의 모습도 다양하고, 또 사랑의 온도와 언어도 변할 수 있음도. 한밤 중 덮어주는 이불의 온도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따뜻한 그것이며 말하지 않아도 표현되는 사랑의 언어라는 것도 더불어.

매거진의 이전글 가로로 자라는 아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