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글쓰기의 정석>
글쓰기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주춤하게 하는 것들은 한 둘이 아닙니다.
여러 개의 것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도 '평범함'의 장벽일 겁니다.
평범한 내가 무얼 쓸 수 있지?
쓴다고 한들 누가 내 글을 봐줄까?
자, 이러한 생각이 들 땐 나에게 발생한 질문의 안을 뜯어봐야 합니다.
질문의 명제를 뽑아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 자체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우리는 대답만 하며 살아왔지 질문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질문하지 않으니 답을 찾을 수 없는 거였고, 답을 찾지 못하니 삶은 늘 방황 그 자체이며 방황하는 자아는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에게 묻고 사색하고 자아를 돌보는 것입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문이 드는 건, 이미 글쓰기의 선물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위 두 질문 속 전제와 명제를 뽑아 볼까요?
나는 평범하다. 평범한 사람은 쓸 것이 없다.
사람들은 평범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한 것만을 읽는다.
전제가 깔린 명제, 명제로 산출된 전제.
'명제'는 참과 거짓을 가리기 위한 '문장'입니다. '참'과 '거짓'은 절대적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볼까요? 저도 글쓰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기도 하고요. 그러한 관점에서 위 두 명제는 '참'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송두리째 바뀐 제 삶을 돌아보면 다시 위 두 명제는 '참'입니다. 아니, '참'을 넘어 '진리'가 됩니다.
평범함의 특별함과
특별함의 평범함
글을 쓰면 자아를 돌아보게 하고, 자아를 돌아보면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손가락질이 나 자신을 향합니다. 변해야 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내가 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첫 단계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먼저 규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기 계발서가 '관점을 바꿔라'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거부감부터 듭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되었다는 거지? 자기 계발서는 하는 말이 매우 똑같군!'... 결국,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말합니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말이죠. 아니, 바꾸기 전에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먼저 알아채야 합니다. 글쓰기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평범함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한 것, 반복되는 것, 지겨운 것. 쓰기 전까진 몰랐습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존재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존재의 눈'. 평범한 것은 매우 값진 것이었고, 일상을 잃어봐야 일상이 얼마나 빛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특별함이 반복되면 평범함이 되고 우리는 또 그 소중함을 잃는다는, 우매하면서도 가련한 삶의 쳇바퀴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보지 않는 것.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소재를 쓰려다 글쓰기가 멈추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평범함에 대해 쓰기 시작하자 글쓰기는 멈추는 일이 없었고, 써 내려간 평범함 들은 특별한 무엇이 되었습니다.
평범함의 특별함과, 특별함의 평범함.
이를 깨달은 것이 글쓰기의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특별함 말고 평범함을 쓰시기 바랍니다.
거창함 말고 당신을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쓸 수 있습니다.
내 글의 첫 독자인 나 자신은 그 글을 읽을 것입니다.
모든 글이 홈런일 필요는 없습니다.
쌓여가는 글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양'의 글쓰기가, '질'의 글쓰기가 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 시작부터 대문호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거창함에 현혹되면, 자아를 잃게 됩니다.
글은 멋 부리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꼼수가 아닙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 놓는 고결한 행위이자 의식입니다.
답은 늘, 당신 안에 있습니다.
이제 그 답을 꺼내어 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