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Nov 13. 2016

글 쓰기가 싫을 때

결국 내 삶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그때

갑자기 날아오는 손바닥 세례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거나 또는 오히려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지각을 한 탓에 실내화로 갈아 신을 마음의 겨를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복도를 내달렸을 때 맞은 뒤통수의 느낌이 아직도 얼얼하다. 하필이면 내 뒤통수를 내려친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무섭고 카리스마가 넘치던, 베토벤의 그 곱슬한 바람머리를 하고 마침 음악을 지도하고 있는 터라 '베토벤' 그 자체로 불리던 분이었다. 쉬는 시간 수업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야! 베토벤 떴다!"라고 하곤 했으니.




내가 글을 쓰자고 마음먹은 건 작년 9월이었다. 생각은 몇 년 동안이나 거듭되었었다. 너무 소비적으로 사는 것 같은 삶에 대한 불평불만이 뭔가를 생산하는 삶으로 변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생산'이라는 것은 결국 '글 쓰기'로 발현되었다. 가끔은 스스로가 기특하다 생각했다. 끈기와 진득한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나 자신에게 이러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난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토해낸 글들을 보면 이것들을 정말 내가 다 썼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냥 재미있어서 쓰기도 했고, 관심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썼다. 업무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도 그랬다. 무엇보다 '생산'하는 맛이 쏠쏠했다. 당장 막대한 투자금이 있어 무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글의 소재가 떠올랐고, 영감이 느껴졌다. 벌여 놓은 카테고리도 많았다. 돌보니 제법 쌓인 게 마냥 허투루 지낸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얼마 전엔 한 카테고리를 본 출판사 관계자가 출판 의뢰를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루고 싶었던 것들이, 어느새 이루어지고 있었다. 글 쓰기는 그렇게 내 삶을 풍족하게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갑작스러운 '뒤통수 치기'가 내 삶을 얼얼하게 했다. '글 쓰기가 싫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그때, 난 베토벤 선생님에게 얻어맞은 뒤통수의 아픔이 생각났다. 1일 1 글을 목표는 온 데 간데없었다. 수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들이 아직도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언젠간 그 아이디어와 인사이트가 부족해 속상했던 적이 있었는데. 초심을 잃은 것일까, 슬럼프일까, 대체 뭘까. 무기력했다. 그리고 또 무기력했다. 다시금 '소비적'인 삶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정도가 이전보다 더 커졌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무엇이 문제일까. 갑자기 휘릭하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변명이 없다. 무기력함의 소산 이리라. 그런데 왜 무기력한건지 모르겠는 이 무력함에 압도되고 만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뭘까 하나하나 생각해보려 한다.




첫째, 내 삶에,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 삶'이란 뭘까. 내가 해야 하는 업무가 있는 사람. 가정이 있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 가정이 행복해야 일이 잘 되고, 일도 잘 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 그러고 보니 마음 한편에 못 다 정리한 일과 업무들이 떠올랐다.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는 그 업무라는 탈의 이름을 쓴 'issue'들은 직장인에게 골칫거리다. 가족들은 내게 큰 힘이 되어줄지언정, 그 'issue'를 해결해 줄 순 없다. 돌이켜보니, 그래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갖은 압박과 실적,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의 부족함이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해야 하는 일'을 해결했을 때 더 자유로울 수 있다. 때론, '해야 하는 일'에서 더 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issue'들은 어쩌면 내 삶의 무기력함의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소비적'으로 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도 잠 못 들고 뭐라도 하려다 큰 보람 없이 잠드는 이유는 바로 그 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다. 나는 안다. 하루를 꽉 채워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마침내 균형 있게 해낸 사람은 '행복한 피곤감'에 취해 곤히 잘 수 있다는 것을.


둘째, 글을 쓰기 위해 지식과 경험을 채웠는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는 어느새 심사위원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평가한다. 나도 가끔 그들을 보며 한 마디를 거든다. "쟤는 열정만 대단한 것 같네. 저러면 오래 못 갈 텐데..." 결국, 그러한 말들이 내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신명 나게 글을 쓰는 것, 수많은 아이디어들과 영감들을 표현하고 내뱉는 생산의 즐거움은 초반에는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진득함과 진실한 글쓰기의 이어짐은 그 초반의 에너지가 다한 후에 나타나는 법. 뱉어내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이고 깨달아야 한다. 즉, 아웃풋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풋이 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쓰고 생산만 하려 했지, 독서나 사색의 시간을 지독히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글들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 표현도 고만고만하여 생각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해내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글 쓰기의 '재미와 보람'은 '두려움과 억지'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사람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생각이 생기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하며 스스로 발전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초반에 느꼈던 글 쓰기의 매력이자 즐거움이었다. 한 마디로, 밑천 떨어진 지금 나는 지식과 경험을 갈구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글을 쓰는 목적을 잊진 않았는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함이었다. 언젠가 뒤를 돌아보아 쌓인 글들이 자산이 될 거라는 믿음.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 목적과 이유가 전도되어선 안된다. 가끔은 글의 조회수나 공유수에 집착할 때가 있다. 그러한 것들이 많은 글을 보며, 단어와 문장을 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좀 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었어야 하나? 더 많은 공유를 위해 제목을 바꿔야 하나?

처음 시작한 글 쓰기의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어떤 소재를 쓰건, 어떤 표현을 하건 자유였다. 하지만 남을 의식하고 조회수라는 숫자를 떠올릴 때마다 '소재와 표현'의 한계가 느껴졌다. 나를 향해 쓰는 글들도, '이렇게 쓰면 보는 사람들이 어떨까? 어떻게 생각할까?'가 먼저 떠올랐다. 글 쓰기의 목적과 이유가 전도된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벌여 놓은 것들이 많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벌여 놓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벌여 놓은 것들을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에 자괴감을 가지고 한탄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못하다는 다소 역설적인 생각도 함께 한다. 스스로 힘들게 사는 사람이란 손가락질을 받아도 마땅하다. 가끔은 나 자신에 한 없이 관대하다가도, 스스로의 모습에 자괴감을 가지곤 하는 것이 못내 우습다. 신이 아닌 이상 자신에 완벽하게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신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벌여 놓은 건 모두 수습하고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어쩌면 언젠간 끝낼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이 조급해 그런 걸 수도 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서둘러 마무리 짓는 것보단 영감에 이끌려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또다시, 스스로에 관대해지려 한다. 조금 지나면 자괴감에 빠질 거면서.




결국,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독서를 하지 않으며 나 자신이 아닌, 남 눈치 보느라 글을 쓰기 싫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 도둑놈 심보다. 이러면서 글 쓰기가 온전하기를 바랐다니. 뒤통수의 얼얼함은 지금 느껴야 한다. 글 쓰기 싫다는 느낌이 들었을 그때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주절주절 대어 당연한 걸 어렵게 깨달았으니, 이게 바로 스스로에게 하사하는 뒤통수의 얼얼함이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든다. 참으로 우습게도. 그리고 한 없이 부끄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쓰고 싶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