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로부터의 사색>
자동차에게 있어 중요한 건 '방향'과 '속도'다.
이는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운전대로부터의 사색은 재미와 의미가 함께다. 운전석에 있으면 '운전'과 '인생'이 오버랩되어, 나에게 많은 글감을 선사한다.
회사에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이 있다.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그 사람이 상사라면 직장생활은 불 보듯 뻔하다. 사사건건 부딪치고, 서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팽팽한 기싸움에 하루의 에너지가 바닥난다. 이게 무슨 악연일까... 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오랜 직장생활을 해온 나는 안다. 어디에나 사이코는 있고, 어디에나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은 존재한다. 내가 모두를 사랑할 수 없듯, 모두가 나를 사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퇴근하는 길, 운전석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자동차엔 엑셀만 있는 게 아니다.
서야 할 때도 있다.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속도를 내되, 잘 설 줄도 알아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주행을 하는 게 아니라 폭주하는 것이며,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자동차의 결말을 우리는 잘 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네 삶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삶을 힘겹게 하는 이들을 보며 어쩌면 그들이 브레이크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 분명 그러하다고 믿는다. 삶의 방해를 받을 때,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당했을 때. 비로소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엑셀'이 '열정'이라면, '브레이크'는 '쉼'이다. 잘 가려면 잘 서야 하고, 잘 서면 안전하게 잘 갈 수 있다.
우리는 전진만이 아니라, 후진과 좌우로도 갈 줄 알아야 한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게 브레이크 아닌가. 서지 못하는 건 자동차가 아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러니까,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자동차는 달리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주차가 가능한 건 브레이크 덕분이다. 다시 달릴 수 있는 채비가 가능한 것도 브레이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와, 삶과, 주위를 살핀다.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나에게 방해를 선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자동차는 메커니즘이고.
삶에 적용되는 메커니즘은 미학(美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