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하얀.
여백.
커서.
무지함.
광활함.
깜빡임.
글을 쓰는데 맞이하는 장벽이 있다면, 장벽은 이 세 가지 성분으로 구성되어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글쓰기나 창작의 고통은, 책상 앞에 앉아 귀에 연필을 꽂고 머리를 쥐어짜거나 종이를 구겨 뒤에 있는 휴지통으로 던지는 것이다. 맞다. 창작의 고통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추억이자 기억이다. 아니면, 그러한 모습이 떠올라 책상 앞에 앉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거나. 단언컨대, 종이를 구겨 던지는 사람보다 장벽 앞에 스러져 시도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내 장벽은 그 어느 누구의 것보다 단단했다.
하얀 여백의 커서는, 나를 조롱하는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뭔지 모를 패배감과 자괴감이 들곤 했다. 글쓰기를 해보자고 결심한 날이었다. 쓸 것도 없고, 필력도 없고, 의지도 없고, 꿈도 없고, 꾸준함도 없고... 괜히 글쓰기를 하자고 다짐해서는... 자책만 홀로 키우고 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쓰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굳이 글감을 쥐어짜지 않아도, 늘 글감이 샘솟는다. 생각나는 모든 걸 쓸 수 없어 안타까울 뿐.
매일 글을 쓰며, 그렇게 깨달았다.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나도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쓸 줄은 몰랐다. 글감이 마르거나, 의지가 바닥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글쓰기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문득, 글쓰기는 삶쓰기라는 말이 떠올랐고 아마도 나는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듯싶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유지하고 있다.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숨 쉬는 것이다. 숨은 쥐어짜지 않는다. 자연스레 해야 하는 생존의 필수 행동이다. 글쓰기를 시작한 때를 돌아보면, 숨을 쉬고 싶어서였다. 즉, 살고 싶어서였다. 삶을 이어가고 싶었던 근원적 본능이 결국 자판을 두드려 내 속의 것을 끄집어내라고 종용한 것이다.
글쓰기는 삶쓰기이고.
살려면 숨 쉬어야 하고, 숨 쉬어야 살 수 있으며.
글쓰기는 숨 쉬기와 같으므로, 나는 삶을 쓸 수밖에 없다.
글이 멈추지 않는다는 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숨 쉬고 있다는 방증이다.
창작의 글은 쥐어짜는 듯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삶의 순간이 축적되어 터져 나오는 삶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대문호들의 글과 작품도 하루에 나오지 않았다. 예술가들을 우리가 동경하는 건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사상과 생각 그리고 삶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 또한 '삶쓰기'를 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 최대의 작품은 만드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이라고. 만남의 대상은 삶이 축적되어 쌓인 어떠한 결과물의 표상이다. 실체가 아닌 그것은 활자로 승화되어, 사람들의 삶에 또다시 스며드는 것이다.
글이 배어 나오는 삶을 살고 있어 나는 좋다.
머리를 쥐어짜지 않는다. 숙제하듯 쓰지 않는다. 축제하듯 쓴다. 배어 나오는 것에 묻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떠한 활자가, 단어가, 생각이, 사색이, 마음과 감정이 나올지 기대된다. 배어 나오는 것들은 내 삶이자 자아다. 배어 나오는 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다.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쓰면 쓸수록.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