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생각보다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침 샤워와 일할 때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그 사이 몇 번 정도? 그마저도 얼굴에 뭐가 묻지 않았는지를 보는 정도이지 유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니 알지 못했던 고백이 스며 나왔다.
거울을 보지 않는 이유. 아니, 얼굴을 유심히 보지 않는 이유. 나이 들어가며 노쇄해져 가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혹여라도 직장에서 자존심이 바닥을 쳤을 때,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쌍해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치와 현실의 괴리감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나는 나를 잘 안다고 모두가 착각한다.
얼굴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표정을 짓는 건 '나'이지만.
그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타인'이다.
얼굴은 그렇다 치자.
마음의 표정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마음의 상태와 마음의 정도를 볼 수 있는 거울은 어디에 있는가?
글쓰기는 거울이다.
두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울.
마음의 표정은 얼굴의 그것보다 더 다양하다.
아니, 얼굴이 마음의 표정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고 마음의 요동을 고려할 때 얼굴의 표정은 마음의 그것보다 단 몇 만 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더군다나, 눈으로는 얼굴을 보지만.
글쓰기로는 우리네 페르소나를 볼 수 있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가면이 아닌.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가면들. 그리하여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무수히도 많이 일어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세상이 우리를 속였다고 노여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세상에 속은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진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글쓰기라는 눈으로 본 거울 속 내 마음의 상태다.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음의 상태도 모르고 그저 자책만 하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분명 그러할 진데, 늦게나마 글쓰기를 만나 속의 것을 내어 놓아 직접 보고 있는 지금이 그나마 내겐 희망이자 위안이다.
감정은 표정으로 표출되고.
자아는 글쓰기로 실체가 된다.
이것이 페르소나 글쓰기의 본질이고.
본질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고귀한 행위와 실천 속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