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절망(絶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절망과 친한 사람이, 절망과 늘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절망'이란 무엇인가.
'끊을 절'. '바랄 망'.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망을 안겨다 주는 모든 것에 나는 분노하곤 했다. 분노의 이유는 몰랐다. 그저 나를 해하려 하는 것들이, 나를 방해하는 것들이. 그리하여 희망을 꺾어 버리는 것들이 싫었고 미웠다. 절망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남을 죽일 것이냐, 나를 죽일 것이냐로 귀결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삶은 빠르게 흘러가고 오늘도 나는 이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글쓰기를 머뭇거렸던 수많은 이유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 소재가 없어서, 필력이 없어서. 쓰지 않으려는 아주 손쉬운 선택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써야 한다는 불편한 선택의 축복이 삶으로 찾아왔다.
더 놀라운 건, 이제 나는 '절망'에 대해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기쁠 때보단 슬플 때, 괜찮을 때보단 아플 때 더 많은 글이 터져 나왔다. 감정의 굴곡이 상하방을 오갈 때, 그러니까 바닥에 있었던 몸과 마음이 어느 하나의 글을 더 많이 생산해 냈다는 것이다.
처음엔 절망을 끄집어내거나, 그것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직접 마주한 그것들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절망의 대부분에 내가 묻어 있고, 나에게 묻어 있는 것 또한 절망이었기에 그것을 떼거나 회피하려는 건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절망을 느끼는 건 나이고, 절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도 나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꼭 절망에서 벗어나야 할까?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우리가 되면 되지 않는가.
미련 없이, 군더더기 없이. 이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않는가. 가지 말라는 길로 갔을 때 더 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상기해 보면, 절망으로 인해 다른 길을 택한 결심은 또 하나의 생존법일는지 모른다.
더 이상 바라지 않고, 다른 것을 찾아내는 용기를 글쓰기를 통해 키워냈다.
절망을 회피하지 말고 바라보면 되고, 그것을 써내어 마주 보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끊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지혜가 생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바랄 때, 삶은 피폐해진다.
꾸준히 바라며 무언가를 이루어갈 때, 삶은 아름다워진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인가.
지혜의 원천은 나 자신에게 있으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지혜는 글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