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단순히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경험을 돌이켜보면 일견 맞는다는 생각이다. 언어는 특정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규칙과 관습에 따라 작동하고, 이 작동법이 곧 우리네 생각법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그가 말한 '감옥'이란 뜻이 우리를 완전히 가두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유도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강'이란 언어는 특정한 색을 떠올리게 한다. 색채와 농도가 다를지라도 사람들의 머리 위엔 이미 같은 색이 상상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어떠한 색도 떠올리지 못한다. 언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반경은 감옥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작을 수 있다. 즉, 언어를 알기에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몰라서 감옥보다 작은 반경에 머물러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브트겐슈타인의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다'란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언어'와 '감옥'의 상관관계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감옥에 갇힐 일이 없다. 아니,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때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는 그의 주장이 확실해 보이나, 말 이상의 것을 나눌 때 나는 그의 말에 의문을 품는다. 때론 언어로 전하지 못하는 그 이상의 것들도 타인에게 전해지고, 같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언어의 맥락을 뛰어넘는 의미들도 있으니까. 그러함에도 그의 생각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감옥의 크기 정도이지 확실히 언어의 구속력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소도시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하루 밤을 위한, 방 하나의 값이 배로 차이나는 두 방이 있었는데 그 차이는 창문이 있고 없고였다. 창이 없는 방을 선택하고는 밤새 후회를 거듭했다. 창문 모양의 액자가 걸려 있었음에도, 만약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출장의 피로와 함께 쉽게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었을 것임에도. 창이 없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옥죄어 왔다. 내 돈도 아닌데, 왜 이 방을 선택했을까. 자는 동안 창을 열 것도 아니면서, 자는 내내 어딘가에 갇혔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방에는 창문이 없다는 말 안에, 나는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다.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 맞다.
그러나,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맥락 안에서 언어는 또 다른 말을 탄생시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감옥의 크기는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 이상의 것이 생성될 때, 그러니까 우리는 자유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더 넓은 감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감옥이라도, '감옥'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한 저항을 하기로 했다. 벗어나지 못할 거라면, 창이라도 뚫자. 그 어떤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보기라도 하자. 사색이라도 하자.
그러다 깨달았다.
'글쓰기'는 '감옥의 창문'이라는 것을.
창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신선한 바람을 들일 수도 있고, 창 밖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도 있다. 창이 없는 방은, 이미 경험해 봐서 그 답답함을 잘 안다. 글을 쓰지 않은 나날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우리는 어차피 우주보다 작은 존재이고 숨 쉬는 한, 약 1.3kg의 뇌에서 보내는 전기자극이 만든 언어라는 개념 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쓰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글쓰기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하고, 답을 찾게 만든다. 답을 찾는 과정이 생각의 확장 구간이며, 생각의 확장은 감옥을 더 넓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크고 작은 창문을 달게 해 준다. 커다랗고 시원하게 뚫린 창이 있는 감옥을 상상해 보자. 덜 답답할 것이다. 더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끝에 이르진 못하더라도, 우주의 끝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은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