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Oct 18. 2024

글쓰기. 두 번째 이름, 페르소나, 삶의 기회

<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전생에 대한 왈가왈부는 많지만 그 실체는 없다.

내세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고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전생과 내세에 대해 그 궁금증을 멈추지 못하는 건, 알게 모르게 우리는 또 다른 삶을 앙망하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이번 생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삶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덕지덕지 따라붙지 않는가. 정도의 차이일 뿐, 새롭고 더 나은 삶을 바라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쉬움이 격해지고, 지금의 삶을 어찌할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하면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이 무기력함을 득달같이 파고드는 녀석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걸 슬럼프나 번아웃 또는 우울이라 부른다. 하지만, 절망에서 희망이 피어오른다고 했던가. 나의 무기력함은 글쓰기라는 꽃을 피워냈다. 무기력함이 우울함의 구덩이로 나를 욱여넣을 때, 나는 그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글쓰기라는 숨통을 찾아내었다. 무작정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내 숨이 멎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글을 쓰고 나는 두 번째 이름을 얻었다.

필명이다. '스테르담'이라는 필명은 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무엇이라도 쓸 수 있는, 무엇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는, 무엇이라도 울어낼 수 있는. 휘발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활자로 엮어내다 보니, 아쉬움과 후회가 확연히 줄었다. 심지어, 아쉬움과 후회는 의미와 깨달음으로 승화하여 삶의 지혜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생긴 건 또 다른 '페르소나'다.

대개의 페르소나는 자의적인 게 아니라 타의적이다. 내가 원해서 쓰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직장인, 아빠, 친구, 남편 등. 나도 모르게 주어지는 페르소나를 겹겹이 쓰다 보면 숨 쉬기가 힘들 정도다. 그런데 '글 쓰는 사람', 그러니까 '작가'란 페르소나는 자의적이고 능동적으로 뒤집어쓴, 삶에 있어 몇 안 되는 사회적 가면이다. 스스로 쓴 페르소나는 산소 공급기와도 같다. 숨을 시원하게 내쉴 수 있고, 겹겹이 쌓인 타의적 페르소나의 숨통도 트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면 삶이 정돈되고, 계속해서 쓰면 작가라는 페르소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이름이 생기고, 또 하나의 페르소나가 생기면.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삶'이 변한다. 이 변화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조금은 수그러들게 해 준다. 왜 태어났는지도 영문도 모르고 숨 쉬는 삶의 부조리를 이해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여유가 없을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고 무기력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삶은 재창조된다고 나는 믿는다.


고로, 글쓰기는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이므로, 내가 나에게 그것을 선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전생이나 내세에 신경 쓸 겨를이 이제는 없다. 그저 나는 내 삶을 살아내고, 오늘의 나를 인식하며, 지금 순간을 쓰기로 한다. 아쉬움과 후회, 무기력은 점차 수그러들고 그것들마저 포용하려는 거룩한 시도가 생겨난다.


삶은 늘 새롭다.

그걸 미처 알지 못했던 때는, 분명 쓰기 이전의 때였다. 이제는 안다. 지긋지긋해 보이는 하루가, 반복되는 나날이 실상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숨 쉬는 매일이.

매일 쓰는 오늘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오늘도 출근하는 나에게'

[신간 안내] '아들아, 나는 너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