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철학관>
불행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더 크게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더 크게'란 뜻은 필요 이상으로 좌절한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불행 앞에 좌절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혹시라도 타인의 불행을 가벼이 여기는 망언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나는 스스로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아파트가 있다고 하자.
층수가 행복에 대한 기본값이다. 1층 정도의 행복에 대한 기대 값이 있는 사람과, 5층의 기대 층에 있는 사람. 불행이란 어느 강력한 힘이 난간에서 그 둘의 등을 떠밀었다고 하자. 바닥으로 떨어진 후 얻는 충격은 누구에게 더 클까?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늘 행복해야 한다는, 내겐 불행한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아파트 층으로 환산했을 때 나는 펜트하우스에 있었지 않나 싶다. 한 마디로, 행운에 대한 기본 값 자체를 너무 높게 설정한 것이다.
'행운'은 '다행스러움을 옮긴다'란 뜻이다.
특히 '운(運)'은 '운전'의 그것과 같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운전대를 잡은 건 우리란 뜻이다. 운전은 내 맘과 같지 않다. 신호에 걸리는 건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이고, 내 주위 차들을 나는 선택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내가 잘 운전하더라도 타인에 의해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나는 또 완벽한가? 그렇지 않은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운전할 때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교통 체증 하나 없으며, 누구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 기본 값이 되면 모든 순간이 힘겨울 것이고, 짜증과 분노가 폭발할 것이다.
고로, 나는 행운에 대한 기본 값을 '0'으로 둔다.
불행에 대한 기본 값도 '0'이다. 행복한 일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금물, 좋지 않은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금물. '0'이란 기본 값을 두면, 삶은 덜 고단해진다. 물론, 그것이 쉽진 않다. 감정과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0'에 수렴하기 쉽지 않고 어쩌면 그것은 신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추구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0'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어렴풋이라도 그 어느 지점이 '0'의 기본값인지를 알게 된다.
행복의 기쁨도, 불행의 슬픔도. 불행이 행운이 되고, 행운이 불행이 되는 삶의 역설 또한 '0'의 그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