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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09. 2017

첫째 아들과 반 고흐 뮤지엄

오늘, 너와 나의 자화상

벼르고 벼르던 길이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고는 모든 것을 다시금 새로 보자는 결심이 있었다. 더불어, 이제 3년을 지내고 4년 차에 접어든, 주재 기간의 마지막 해라 그런 마음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가족들과 반 고흐 미술관을 다 함께 다시금 가보고자 했다. 마침, 반 고흐 미술관이 새단장을 마친 데다 한국어 서비스도 함께 생겼기 때문에.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둘째가 아침 고열과 기침으로 밖으로 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전날, 뮤지엄 카드를 토대로 한국어 서비스 장비를 예약까지 해놨는데, 순간 아이 아픈 것보다 그게 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보다 조금은 더 왜소해 보이는, 둘째 아들 녀석의 기침으로 인한 몸의 자그마한 요동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어쩌랴. 첫째 녀석과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티켓 예약 뿐만 아니라 최근 개시된 한국어 서비스도 함께 신청을


아빠, 여기 앉으니 다르게 보여요.

첫째 녀석이 앞자리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내뱉은 말이다. 조수석은 항상 엄마 자리였으니 첫째 녀석이 내 옆에 앉을 일은 좀처럼 없었다. 만날 뒤에 앉다 보는 앞으로 향하는 시선들이 제법 새로웠나 보다. 내가 운전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려는 듯,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팔을 좌우측으로 돌리는 녀석. 이 녀석이 운전하는 차를 탈 때쯤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늘은 흐렸고 또 흐렸다.

그럼에도 기분은 정말 좋았다. 네덜란드 겨울 날씨 중에 그나마 덜 우울한? 그것인 것도 그랬지만, 첫째 녀석과 어쩌다 하게 된 데이트가 문득 설렜기 때문이다. 결혼 전엔 운전석 옆엔 항상 여자 (와이프라고 하자. 무조건)가 앉아 있었고, 그 차의 바퀴는 어느 분위기 좋은 장소나 식당을 향했다. 감미롭거나 비트 있는 세련된 음악은 필수였다. 지금은 흘러나오는 차분한 클래식 음악에 옆 좌석 첫째 녀석이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는 모습이, 평소에는 그리 자주 생각해본 장면은 아니었다.

반고흐 뮤지엄 입장 전 둘러본 국립중앙 박물관 전경
얼마전 스케이트에 트라우마가 생긴 첫째 녀석은 멀뚱히 바라보기만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앞으로 살다 이런 일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들로서 살아온 지 이제 나도 수십년이니, 난 이 녀석의 변화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 머지않아, 가족 여행을 거부할 것이고 따라간다 한들 휴대폰 속 친구들과의 메신저에 더 집중할 것이다. 더더군다나, 아빠와 단 둘이 데이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딸을 낳아 팔짱 끼고 영화 보고 데이트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아들 둘의 아빠가 되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설레고 기분이 좋은 건 부모라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어떻게 변하게 될지 빤히 보이는 아들 녀석의 그러지 않겠다는 거짓말도 귀여워 보일 정도니.


손잡고 찾아다니는 숫자와 그림에 대한 설명.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정도가 되니 신기하다.


반 고흐 미술관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5 말부터 새롭게 단장한 원통형 유리 건물로 들어가면 이어지는 건물. 명성에 비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 겸손하고 수수하게 서 있던 반 고흐 뮤지엄에 생긴 작은 사치와 같다. 물론, 여전히 수수하다. 랜드마크 성격의 것은 아니고, 순전히 입구와 조금은 더 넓은 기념품 공간을 위한 실용적 설계가 눈에 보인다. 반 고흐의 연대기와 그가 지냈던 장소를 기점으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전시된 그림들이 즐비하다. 가끔은 한국에서 오신 출장자 분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고 가족과 함께도 했지만, 한국어 서비스 지원을 받으며 이리 자세히 보게 된 건 또 처음이었다. 그것도 첫째 녀석과 손잡고.


새로 개장한 반고흐 뮤지엄 입구
예전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 서 있었던 구 입구
연도별, 지역별, 지인별 등으로 나누어진 박물관 내부



반 고흐는 분명 대단한 화가였다.

내가 인정하고 안 하고를 떠나 그는 분명 최고의 화가다. 이제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친숙해져서 그의 얼굴도 위대한 예술가라기보다는 그저 네덜란드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들도 '반 고흐 할아버지'보러 가자.... 하면 '방구 할아버지?'라며 한껏 친밀감을 표현한다. 둘째 녀석에겐 아직도 '반 고흐'라는 이름은 애석하게도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던 그의 삶 속에 애환이 담겨있다. 작품의 열정과 믿음이 지나쳐,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친구와 세상을 향해 귀를 잘라 보였던 그다. 그 사건은,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고뇌였음을 누구라도 알 수가 있다.


메인 1층에 자리잡은 그의 자화상. 모델료가 비쌌던 탓에 자화상이 많다.
반고흐의 일생.
젋었을 때, 우리에게는 낯선 어느 네덜란드인과 다름 없는 모습의 반고흐
예술가로서 소울메이트였던 고갱이 그려준 반고흐. 해바라기의 구도와 그의 얼굴이 그리 밝아보이지만은 않는다.


다시 보니, 자세히 보니 더 아름답다.

그의 그림이 그렇다. 무지에서 비롯한 스쳐 지나감이 얼마나 고되고 고된 고흐의 터치를 무시했는지 깨닫는다. 그가 나타내고자 했던 농부들의 손, 정직한 감자와 식량. 그리고 보색을 이용해 그림을 빛나게 하고 정신 병원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밀레의 그림을 스스로의 스타일에 맞추어 재창조한 것. 그의 여인을 큰 탬버린 테이블 위에 그려내면서 모두가 간과했던 그녀의 눈빛과 손에 들린 담배. 아, 사실, 그 테이블이 커다란 탬버린이었다는 것도 여지껏 몰랐던 것들이다. 겨울에도 강건히 피어나는 아몬드 나무와 꽃을 그려 자신의 조카인 빈센트에게 준 고흐. 이제는 그 빈센트가 반 고흐 뮤지엄의 설립자가 되어 보답했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예술가는 자신의 삶으로 그림들을 말하기에 더 위대하다. 그리고 더 아름답다.

화려한 자화상. 짧은 선으로 대상을 구체화하고, 보색을 활용하여 빛을 대비하는 새로운 기법이 점점 더 묻어난다.
농촌을 앙망한 반고흐
그는 농촌과 농부의 삶이 진정한 삶이며 정직한 삶이라 생각했다.
여러 습작을거쳐 탄생한 감자 먹는 사람들. 사람들이 일군 감자를 집어드는 정직한 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해바라기를 보고 그린 4개 중 하나의 해바라기. 강렬한 노란색이 인상적이다.
외출 할 때의 밀짚모자가 걸린 그의 방. 자세히 들으니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프랑스에서 더욱 짙어진 노란색.


너와 나의 자화상

첫째 아들과 함께 한 아침나절의 데이트. 배가 고파 박물관 근처 한편 햄버거집에서 햄버거와 밀크 셰이크를 쪽쪽 빠는 부자. 나는 아이들의 얼굴과 모습을 하루가 멀다 하고 사진으로 담는다. 내가 그려주는 너의 초상화. 그런 너희들은 아빠를, 엄마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너희는 행복할까. 내가 그리는 나의 자화상은 또 어떨까? 첫째 네가 그리는 너의 자화상은? 카메라의 모드를 셀카로 바꾸어 둘의 얼굴을 찍어본다.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첫째는 나와 그리 똑같다고 하는데, 나는 항상 그 정도는 아니라고 웃어넘긴다.


지금은 내가 큰 산과 같을 테지.

슈퍼히어로와 다름없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슈퍼히어로는 힘을 잃어 가고, 네가 생각했던 그 크기의 산이 사실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알아가겠지. 언젠가 네가 자라서, 초라해진 내 모습을 보며 그 크기의 기억 말고 오늘과 같이 함께 손 잡고 즐겼던 하루의 추억을 기억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래 주리라 믿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해보지 못한 걸 너는 했으니.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는 나에게, 이러한 추억을 선사한 너는 나에게 그래서 복이고 삶의 희망이다. 오늘 너와 함께한 우리의 시간이, 어쩌면 반 고흐 할아버지가 그린 그 그림들의 향연과 빛에 녹아진 그것인가 보다. 우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사랑한다. 아들.


테오의 아들, 자신의 조카가 태어났을 때 그려준 그림. 조카인 빈센트는 반고흐 뮤지엄의 설립자다.
밀레의 그림을 재창조한 반고흐. 정신 병원에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린 그림.
뮤지엄 관람을 마치고 함께 배를 채우기 위해 발길을 멈춘 햄버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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