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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12. 2017

유럽의 발코니에서

스페인 네르하에서 찬란했던 너희들에게


- 여정 -

암스테르담 To 말라가 (비행 3시간)
말라가 To 론다 (110km)
론다 To 세비아 (134km, 2박)

세비아 To 코르도바 (141km)

코르도바 To 그라나다 (208km, 2박)

그라나다 To 네르하 (93km)

네르하 To 프리질리아나 (10km)

프리질리아나 To 말라가 (54km, 1박)

말라가 To 암스테르담 (비행 3시간)



그곳은 겨울 바다였어.


'유럽의 발코니'란 수식어가 있는 곳. 수식어가 참 걸맞았어. 어디에 가도 이런 경치는 있을 법한데. 어쩌면 이보다 더 수려한 곳이 있을 텐데. 운이 좋은 건지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건지, 여기 네르하는 '유럽의 발코니'라는 수식어를 거머쥐었어.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만들어가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아. 그건 누가 붙여주기도 하고, 또 자신이 만들어 의도치 않게 달고 다니기도 해.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세상은 그리 쉽사리 누군가를 좋게 인정해주는 일이 흔치는 않거든.


해는 중천에 체감 온도는 따뜻.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곳은 겨울 바다였어. 크리스마스가 이제 막 지난, 입을 오므리고 내뱉는 입김의 모양이 재미있고 호빵이 간절하게 생각나야 할 그때 말이지. 추위와 강풍을 피해 온 곳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펼쳐진 따뜻함의 기운은 다시 한번 감사라는 말을 되뇌게 했지. 너희가 커서 나중에 이 글을 보게 되어도 당시의 것들이 생생히 기억났으면 좋겠다. 이제 막 도착한 네르하에서 한 겨울이지만 두터운 외투가 거추장스러웠던. 행복했던 가족 여행의 여정을 말이야.


한 겨울의 네르하


바다를 안고 있는 육지는 느낌이 참 달라.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반기는 바닷바람에 너희는 한껏 들떴지. 외투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언제 바다로 뛰어들 수 있냐고 물어댔어. 어린 건지 젊은 건지. 사실 우린 너희들의 손에 바닷물을 묻히게 할까 말까도 결정하지 못한 때였어. 겨울은 겨울이었으니까. 한 겨울에 아이들을 바다에 풀어놓고 놀리기에는 우린 아직 그 정도로 과감하거나 초보이거나 막무가내인 부모는 아닌 듯 해. 너희도 동의하지? 바다를 안고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 직감적으로 느껴져. 바다가 어느 쪽인지. 불어오는 바람을 굳이 마주 보지 않더라도 말이야. 


네르하의 발코니 그리고 유럽의 발코니
발코니의 작은 입구
유럽의 발코니에서 즐기는 맛과 멋
먹물이 최선을 다해 진했던, 맛도 최선이었던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


바다를 품은 마을의 여유


하얀색이 즐비한 마을. 파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은 이곳에 바다가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같아. '나 바다를 품고 있는 마을이야!' 마치 이러는 것처럼. 그래서 모든 것이 신기해 보이고, 기분은 들떠버리고 말지. 더더군다나 겨울이라는 단어를 잊게 해주는 분위기에 한껏 취해서 말이야. 곳곳의 골목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너희들이 사랑스럽더라. 물론,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는 겨울바다와는 상관없는 장난감에서 눈을 못 떼기도 했지. 다 큰 것 같아도 아직은 아이들이라는 걸 한 껏 깨닫는 시간들이야. 그럴 때면.

골목 골목도 흥미롭다
하얀색이 즐비한 여유있는 바닷가 마을.


바다와 함께, 햇살과 함께 찬란했던 너희들


겨울 바다지만 하늘은 한 없이 푸르렀어. 너희들은 이내 바닷가로 달려갔지. 처음엔 파도 물 끝을 피했고, 덥다며 외투를 벗었고, 10분이 지나지 않아 신발이 젖었다며 투덜댔지. 투덜댈 때 알았어야 했어. 그 즐거움의 투덜댐이 바닷속으로 들어갈 거라는 선전포고였다는 걸. 물속으로 가기 전 준비 운동이었다는 걸.

이내 온몸을 바다에 맡겨 버린 너희 두 녀석은 두 시간을 즐겁게 놀았지. 초라하게 망가진 간이 의자에 앉아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나에게, 멀리서 바라 본 너희 둘의 모습은 정말..."찬란했어."


바다와 햇살, 그리고 저기 저 멀리에 어우러진 너희 실루엣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어. 고루한 표현이라도 어쩔 수 없어. 그것을 잘 표현할 다른 말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찬란했거든.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올랐어. 


"너희는 너희들 스스로의 희망이다!"


울컥함이 몰려 오더라. 감격스러워서. '행복'이란 걸 과분하게 느껴서. 한 겨울에 햇살을 가려주는 원반 모양의 우산 아래, 다리 한쪽이 망가진 간이 의자에 허리가 불편하게 앉아 있던 내게 보인 너희들의 찬란함 때문에. 너희의 '어림'이, '젊음'이, 아직은 삶에 대한 '무지'가 보여 부럽기도 했고.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에,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 것 같아 뿌듯했고, 알아서 잘 즐겨주어서 고마웠고. 어쩌면, 나도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는가 보다 했지. 유럽의 발코니에서 와이프와 낭만으로 샹그리아를 건배한 그때, 우리는 남자와 여자라기보다는 '부모'라는 이름으로 한데 뭉쳐있었던 걸. 살아가면서 맞이해야 하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말이야. 아마 너희도 나중에 갑자기 역할이 바뀌고,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게 더 많을 때.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삶의 주위에 수두룩할 때, 바닷가에서도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햇살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미간을 찌푸릴 때 우리를 조금은 더 이해하겠지. 나도 그런 걸. 이제야 나를 키운 부모님의 위대함이 새삼 느껴지니 말이야. 

자, 너희는 너희들의 희망이야. 내가 줄 수 있는 희망과 행복은 한계가 있어.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 어느 정도까지는 내가 알려줘야 하겠지. 하지만 내 손을, 내 품을 떠날 그 언제쯤... 나는 너희들이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론 매우 섭섭할 거야. 



대책 없이 바다에서 너희를 놀린 부모로서, 물 밖에 나와 사시나무 떨듯 떨던 너희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프기도 하고 급하게 수건을 공수하고, 다시 주차된 차로 가서 새 옷을 가져오는 분주함을 겪었지. 그래도 좋더라. 찬란했던 너희들의 모습에. 기억에. 추억에. 


그렇게 내내 찬란하여라. 어여뻐라. 너희들이 스스로의 희망임을 잊지 않으며.


첫 시작은 언제나. 그렇지 뭐.
본격적으로.
겨울바다가 뭐. 즐거우면 그만.
찬란하다. 너희들. 부럽다. 행복하다. 사랑한다.


바다와 맞닿은 절벽에 지어진 누군가의 집. 문을 열면 바다라니.
햇살을 가려주는 작은 차양 우산이 주는 즐거움이란, 살아가다 우연히 만난 작은 행운.
바다로 가지 못하는 배. 한 때는 바다를 누렸던 배. 이제는 육지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폐허가 된 어느 곳에서, 다음 여름을 기약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흔들 의자. 좋은 날을 기다리는 건 모든 것들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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