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표 101가지 삶의 지혜>
"부먹이세요, 찍먹이세요?"
아빠는 이 질문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부먹이라고하면 찍먹파인 누군가는 미간을 찡그리겠지. 찍먹이라고하면 반대로 부먹파인 누군가는 입술을 씰룩댈 것이고.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아빠는 부먹과 찍먹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부먹을 하고 싶은 날이 있고, 찍먹하고 싶은 날이 있기 때문에. 부먹을 원하는 '나'도 있고, 찍먹을 원하는 '나'도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 즉 너희도 첫째는 부먹을 원하고 둘째는 찍먹을 원하지.
아빠가 이 질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아니 오히려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다.
질문 안에 있는 '강요'와 '겁박'의 뉘앙스 때문이지.
부먹을 원한다고 하면 '아니, 다른 사람 배려는 안 하나요?'라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찍먹이라고 말하면 '그렇게 먹는 거 아니에요!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시는군요?'라는 반응들이 쏟아질 테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걸까?
아빠는 이 질문부터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맞고 틀리고는 없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논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먹과 찍먹으로 사람을 나누고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별하려 들까?
바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때문이야.
'이데올로기'는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를 말해. 원뜻으로 보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의미일 수 있겠지.
그러나 이렇게 된 '개념'이 '신념'이 되어 누군가에 그것을 '강요'하게 된다면 그것은 '압력'과 '폭력'이 된다.
내가 생각하고 믿는 것이 곧 기준이 되는, 합의되지 않은 기준.
이데올로기의 부작용이자 우리가 부먹과 찍먹을 구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부먹과 찍먹은 상대방의 식성을 배려하는 질문으로 충분하다.
그 질문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세상을, 삶을, 사람을 그리고 인생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 않기를.
더불어, 지금 아빠의 글과 생각도 기준이 되어 너희에게 강요로 다가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판단은 너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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