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거나, 쓰다가 지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러 가지'를 두 개로 요약해 보자면 '시간'과 '글감'이 될 것이다. 중요도를 보자면 나는 '시간'보다는 '글감'에 더 무게를 둔다. 시간을 내어 카페에 앉아, 글을 써보자며 노트북을 열고 한 참을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기에. 깜빡이는 커서가, 껌뻑이는 것처럼 시간의 늘어짐을 경험하며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허탈해 한 시간도 한가득이기에.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감이 있어야 그 시간의 가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감'이 부족하거나, 금세 동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겐 글감이 늘 따른다.
쓰지 못해 메모만 해둔 글감도 수두룩하고, 그것을 다 쓰지도 못했는데 이런저런 글감이 또 치고 올라온다. 죽기 전까지 다 써낼 수 있을까... 란 어벌쩡한 고민까지 한다. 글을 쓰고 난 후에 찾아온 축복이랄까. 모든 순간이, 일상이, 고통과 기쁨이 글감이 되는 이 희열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런 내게도 글감 찾기에 어려운 때가 있었다.
무언가 다 소진된 느낌. 쓴 걸 또 쓰는 것 같은 회의감. 새로울 것도 없이, 고만고만하게 느껴지는 필력. 그때를 돌아보면, 나에겐 색안경이 써져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색안경. 일상을 그저 그런대로 받아들이고, 뭐 하나 새로울 것 없이 주위를 바라보고. 감흥도 없이, 느낌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갔던 때다. 자연스레 글쓰기도 멈췄다. 글감이 없다고 생각하니, 글쓰기가 멈추고. 글쓰기가 멈추니, 주위를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는 악순환.
글쓰기의 선순환은 뭐니 뭐니 해도 일상에서 찾는 통찰이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보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것을 특별하게 보는 힘. 나는 그것을 글쓰기로부터 얻었는데,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나 스스로 저서에 썼던 글귀를 누군가의 서평에서 찾아냈다.
글감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관점과 시야가 한정되어 있을 뿐.
그렇다.
글감은 널려 있다. 일상에도, 내 안에도, 생각에도, 반복되는 날들에도, 타인에게도, 원수에게도, 직장에도, 사업장에도. 그리고 나에게 덕지덕지 붙은 페르소나에도.
'자아'를 바라보지 못할 때, 스스로를 챙기지 못할 때 이러한 시야의 제약은 서슴없이 발동한다.
세상은 자아를 돌아보는 데 협조하지 않는다. 아니, 방해한다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온갖 자극적인 무언가로 순간순간을 잊게 만들고, 그리하여 소비하게 만든다.
우리의 시야는 이미 짧고 빠른 것들에 빼앗기고 있지 않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명상이나 글쓰기는 따분한 것으로 치부되고, 짧은 동영상은 몇 시간이고 쉽게 볼 수 있는 시대.
한정된 것이 무엇일까.
내 관점과 시야는 어느 만큼 좁아졌는가.
자아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움직임이, 오히려 더 큰 시야와 관점을 열어주는 역설적인 시작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돋보기'는 도구다. 도구라는 관점에 있어서 '글쓰기'는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아주 좋은 수단이다.
글감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종합 정보]
[신간 안내] '아들아, 나는 너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소통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