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그리고 나의 길.
회사에서 필요로 하여 나를 이곳으로 보낸, 그러니까 주재원으로 근무한 지 이제 만 3년이 지나 4년째가 된 것이다. 보통 주재원의 임기는 4년이다. 그러니 올해가 네덜란드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변수가 생겨 좀 더 연장이 되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난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고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다시 새롭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처음'이라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만, '처음'은 좀처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다. 끝난 것도 아닌데 벌써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닥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움과 걱정을 하는 나약한 사람의 본능일 것이다.
살기 좋고 아름다운 네덜란드지만 출근길은 곤욕이다. 밀리고 해결되지 않은 업무를 떠올려야 하는 여정이니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내가 운전을 해가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 물론, 한국에서 좀비처럼 통근 버스에 올라타거나, 하루에 사용할 에너지의 50% 이상을 발산해야 했던 지옥철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곳의 출근길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끔은 창밖을 보면 잠시 현실을 잊게 하는 정도다. 그런데 그런 것이 오히려 더 힘들다. 단 몇 초라도 현실을 떠나 돌아온 이곳의 무게는 더 큰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축복이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매일의 출근길이 그림과 같기 때문이다. 과연, 반 고흐와 같은 걸출한 화가가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될 정도다.
집을 나와 사무실까지 약 7km. 차로 대략 10여분이 걸리는 출근길은 명화의 연속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오솔길과 같은 쭉 펼쳐진 도로를 지나, 그 도로의 끝을 만나면 좌회전을 해 운하길로 접어든다. 해변 도로를 달릴 때의 낭만은 아니더라도, 그윽한 운치와 평화가 느껴진다. 어느 유명 화가의 그림에서나 봤을 법한 그림들의 연속. 액자 없이 파노라마로 쭈욱 이어진 그림처럼.
부임한 첫 해는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사업의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미래는 암울했다.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 온 자의 앞날에 대한 지극한 두려움과, 조만간 함께 할 가족들에게 면을 세워야 하는 가장의 무거움까지 나를 짓눌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아름다운 출근길. 멜론 100곡을 듣는 것이 죄책감이 들만큼 이름다웠다. 그래서 듣지도 않던 클래식을 집어 들었다. 대학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돈 주고 산 바흐 CD. 존경하던 교수님의 추천이었다. 이제 20년이 지나 그 CD는 3년이 지나 4년째 열일 하고 있다. 마음의 위안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더불어, 그 클래식 음악이 지나가는 풍경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잠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기분. 힘든 마음과 위안, 그리고 그때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그래서 바흐의 음악은 내 차 안의 공간을 언제나 울리고 있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출근길'이란 이유로 나에게 홀대받던 그곳을 오늘 아침 찾아갔다. 주말의 첫날, 오전 6시 30분에 떠진 눈의 나는 그곳으로 이끌렸다. '행동으로 좀 옮겨야지.'라고 한 때는 이미 생각을 수백 번은 하고 난 다음이다. 출근길에 생각했던 생각. 언젠가 한 번 출근길을 따라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 봐야지... 그 '언젠가'가 몇 년을 지나 다가오게 된 것이다. 겨울이니 단단한 채비를 했다. 그리고 나섰다. 주말이기에 출근하는 날은 아니지만, 출근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평일보다는 조금은 여유롭게, 그렇게 출근길을 곱씹었다. 초심을 곱씹었다. 내 후배들에게, 내 인턴들에게 주제넘게 했던 말. "초심은 변할 수 있지만, 잃지는 말아라!" 내가 했던 횟수만큼, 정확하게 그 말들은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의 그 길은 더불어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해왔다. 손이 시려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답할 준비가 나는 아직 덜 되어 있었다.
그저 그렇게 지내오다 문득 '마지막 해'라고 규정한 올해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맺고 끊음이 있기에 어쩌면 사람들은 초심과 마지막을 특히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기억하고 돌아봐야 할 것들은, 그 중간과 과정일 텐데 바쁘다는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나마, 시간을 정하고 '유한'의 기준을 두었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사람의 삶이 그런 것도, 일 년이, 한 달이, 하루가, 아침과 점심 저녁이 쪼개지는 것도 모두 순간을 돌아보라는 누군가의 뜻이라는 걸. 출근길 하나로 시작해 인생을 들먹이며 이렇게 길게 주절 대는 것 보니, 과연 네덜란드의 겨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