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에 대한 고찰
"네덜란드 사람들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는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그 황금기는 해상무역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황금은 처음부터 황금이 아니다. 강가에서 황금을 채취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허리를 꾸부정히 하고 모래를 듬뿍 퍼내어 물에 잘 고르고, 쳐내어 마침내 황금을 발견한다. 그 황금보다 수천수만 배의 물과 모래가 가셔야 보일 듯 말듯한 이것의 값어치는 그래서 높다. 네덜란드가 황금기를 맞이하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 네덜란드의 세계를 향한 출항의 시작은 보기에는 야심 찼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물론 그 참혹했던 고생이 씨앗이 되어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선사한 단초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배의 이름은 모리셔스호였다.
249명의 선원을 나눠 태운 세 척의 배와 소형 범선 한 척을 거느린 거대한 배였다. 나머지 배들의 이름은 ‘암스테르담 호’, ‘홀란디아 호’, ‘다위프컨 호’였다. 1595년이었고, 때는 4월의 어느 때였다. 이 모든 배의 지휘관은 코르넬리스 데 하우트만 (Cornelis de Houtman). 그 젊은 기백은 하늘을 찔렀다. 금의환향에 대한 강렬한 의지도 함께였다. 하지만 적도를 지나 열대 지역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패닉 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와 간식은 물론, 물과 맥주까지 모든 것이 악취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음식을 조리할 때 필수였던 버터는 녹아 흘러, 마치 아비규환의 미래를 생생히 보여주는 듯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괴혈병이 돌았다. 죽지 않은 사람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통증과 치아가 빠져나가고 머리가 빠지는 심각한 증상을 겪어야 했다. 1597년 8월 4일. 출항할 때 4척이던 배는 단 세척이 되어 돌아왔다. 249명이었던 사람들은 89명으로 줄어 있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아니, 어째좀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첫 동인도 원정이 남긴 결과는 처참했지만, 원정의 자금책이었던 아홉 명의 무역상들에겐 무한한 가능성만이 보였던 것이다. 앙상한 몰골로 돌아와, 그간의 갖은 풍파를 말하는 초라한 사람들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원정대가 어렵사리 가져온 소량의 후추가, 그들의 투자액을 회수시키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암스테르담 담 광장 근처. 그곳이 희망의 본거지가 되어 조선소가 들어서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투자 금액은 더하고 더해졌다. 기회만 보인다면 이러한 ‘광기’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앞서 언급했던 ‘튤립 파동’도 이러한 맥락을 함께 한다. (참고 글: "꽃바보 네덜란드") 데 하우트만이 첫 번째 항해를 초라한 몰골로 돌아온 지 4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이미 약 65척의 배가 아시아라고 생각되는 남서쪽을 향해 이미 출항을 마친 상태였다.
일찍이 봉건제를 거부했던 네덜란드는 사유재산의 개념을 확립하였고, 이러한 실리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연합 동인도회사’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VOC로,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페레니흐더 오스트인디스허 콤파흐니라 부른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네덜란드 사람 박연과 하멜이 이 회사 소속이다.) VOC가 출범된 네덜란드, 그것도 암스테르담이 이제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계 지도의 역사를 바꾼 일이라 해도 좋다. 동서양의 만남이 성해지고, 각각의 문화가 교미했다. 현대 사회의 회사 시스템, 지도 제작술과 조선술을 역사이래 가장 빠르게 발전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취득한 부와 식민지가 아직도 남아 네덜란드와 유럽이 ‘선진국’이란 타이틀을 쥐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최대 규모의 선박/ 항해 축제"
그러기에 “Sail Amsterdam”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향수와 자부심을 고취시켜 주는 중요한 행사다. 그 황금기를 꼭 빼닮은 한여름의 8월, 매 5년마다 열리는 이 축제의 규모는 상당하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뒤편의 큰 호수는 거대한 범선들과 요트, 개인 배들로 북적인다. 거대하고 오래된 모양의 범선들이 오가면, 과연 암스테르담의 그 황금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해군도 참가하여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이 동원되기도 한다. 범선은 세계 각지에서 직접 항해를 해와 이 축제에 참여한다. (2015년 기준 참여 국가: 독일, 콜롬비아,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 노르웨이, 폴란드, 영국, 칠레, 스웨덴, 에콰도르, USA, 러시아, 체코, 벨기에, 포르투갈, 인도, 시에라레온, 호주)
운이 좋게도 2015년 축제에 참석할 수가 있었고, 다음은 2020년 또 그다음은 2025년이 될 것이다. (2015년은 8월 19일부터 23일까지 축제가 이어졌고, 2.3백만 명이 축제를 즐긴 것으로 추산된다.) 이 축제는 1975년에 암스테르담 시 700주년을 기념하는 하나의 행사로 시도되었다가 반응이 좋아 매 5년 실시되어 왔다. 다양한 배들의 향연뿐 아니라, 중간중간에 섬처럼 떠 있는 콘서트 배를 관람하거나 정박해 있는 범선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자동차 모양이나 그 외 개성 넘치는 보트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때는 네덜란드에 등록된 개인 배를 가지고 암스테르담으로 모일 수가 있는데, 거대한 범선과 2~3명이 타는 보트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모습들이 다채롭다.
직접 배를 타기 위해서는 보트를 가진 네덜란드 친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공식 홈페이지 (sail.nl)에서 정보를 얻고 예매한다. 6월부터 오픈되지만, 사실 탈 수 있는 배를 구하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가격도 비싸 정신 건강엔 그리 좋지 않다. 꼭 타지 않아도 그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는 있으니 너무 배 타는 것에 집착하진 말자. 다행히, 행사 기간에도 암스테르담 역에서 북부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Ferry (페리)는 정상 운영된다고 하니 이거라도 타보자. Ferry는 언제나, 무려 무료다. 평소에도 공짜로 자주 운영되니 그냥 한 번 타보는 것도 좋다.
만약, 운 좋게 배를 탈 수 있다면 정해진 코스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 경우는, 거래선 사장의 초대로 렌트한 배에 올라탈 수 있었고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와인과 간단한 식사 정도를 할 수 있는 배였다. 한 바퀴 코스를 도는 데에는 약 1시간이 걸린다. 지나가는 큰 배와 작은 배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모두가 웃고, 모두가 즐겁다. 큰 물결을 만들어 내는 큰 배 옆으로 지나가는 아찔한 작은 배들도 그 웃음은 여전하다.
배에 올라 한바퀴 코스를 돌면 약 1시간이 소요 된다.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시간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늦은 저녁 해가 뉘엿뉘엿하면, 군데군데서 들리는 재즈와 클래식, 팝의 멜로디가 사방을 감싼다. 잠시 후면 있을 불꽃 축제를 위한 전조처럼 들린다. 이어지는 불꽃놀이는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대한 그 해의 축제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아쉽지만, 다시 5년 후를 기약한다.
[Episode]
친한 동료가 배 안에서 지나가던 작은 보트 사람들에게 더치어로 뭔가를 연신 설명했다. 인사가 길어 보여 무슨 말을한 건지, 아니면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 사람들에게 “혹시 화장실 필요하면 여기로 건너오라”는 농담을 던진 거였다. 그러고 보니, 작은 보트들은 화장실이 따로 없다. 그런데 기분에 취해 마시는 와인과 맥주의 양은 상당하니…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농담 아닌 농담이 아니었을까 한다.
[네덜란드 ‘Sail Amsterdam’ 제대로 즐기기]
공식 웹사이트 (sail.nl)에서 일정 및 배 예약을 확인한다.
배를 꼭 탈 필요는 없다.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 구경할 수도 있고, 배들의 퍼레이드를 볼 수 있는 목 좋은 곳들이 도처에 있다.
무료로 운영되는 Ferry를 이용하면 그나마 기분을 낼 수 있다. Ferry는 항상 무료로 운영된다.
일교차가 크고, 물 가까이 가면 추울 수 있으니 바람막이나 겉 옷은 필수다.
불꽃놀이는 해가지고 밤 10시가 넘어 진행되니, 아이들이 있다면 조금 힘들 수 있다.
참고글: "Iamsterdam"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