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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와 욕망 사이에서

<스테르담 심리 에세이>

by 스테르담

때로, 나는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정말 헷갈릴 때가 있다.

나라는 존재의 변덕은 날씨보다도 더 변화무쌍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 날씨를 제대로 맞추지 못할 때 사람들은 기상청이 '일기 예보'가 아닌 '일기 중계'를 하고 있다 말한다. 내 마음속 '마음청'은 '마음 예보'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정해진 시간, 장소에서 어떠한 마음이 들지는 나 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론, '마음 중계'조차 힘들 때가 있다.


이러한 변덕과 불확실성은 '욕구'에 기반한다.

'욕구'는 인간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요소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고, 안전한 곳을 추구해야 생존의 기회가 높아진다. 욕구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신호가 오면 잠시 참을 수 있을진 몰라도 끝내 그것을 막을 순 없다.


그런데, 잠깐.

나는 또 하나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건 '욕망'이다. 그러게, '욕구'와 '욕망'의 차이는 무엇일까? '구하는 것'과 '바라는 것'의 차이? 'Needs'와 'Desires'의 차이? 나는 이것에 좀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바라는 것을 조금은 더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고프다는 '욕구'가 올라왔을 때, 나는 머리에 갖가지 음식을 떠올린다.

떠올린 음식은 식당으로 전이되며, 식당으로 전이된 생각은 그곳에 직접 방문을 할까... 아니면 배달을 시켜 먹을까, 장을 봐 직접 해 먹을까로 확장된다. 이러한 확장은 '욕망'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욕구'가 떠오른 갈망이라면, '욕망'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자 해결법이다. '배고픔'은 욕구, '분위기 있는 곳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라 말할 수 있다.


'욕망'은 '욕구'에 비해 주체성이 더 반영될 수 있다.

배고픈 배는 어찌할 수 없지만 얼마나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서 먹을지, 누구와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크를 먹고 싶은 욕망이 떠올랐더라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혼자 가서 먹기 좀 그렇거나, 그렇다고 배달을 시키려 했으나 어제 자로 만료된 할인 쿠폰 때문에 욕망했던 그것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의 성숙도를 갈음하는 것이, '욕구'와 '욕망'에 있다고 생각한다.

생겨 나는 욕구야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욕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배고프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거나, 번식의 욕구가 차올랐다고 타인을 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성숙하고 더 멋진 삶을 구축해 나아갈 수도 있다.


오늘 나에게 차오른 '욕구'는 무엇이었는가.

그리하여 나는 무엇을 '욕망'하였는가.


욕망한 '욕망'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성숙하게? 미천하게? 생산적으로? 소비적으로? 누군가에 도움이 되도록? 또는 누군가에 피해가 가도록?


'욕구'와 '욕망' 사이에 놓인, 인생이라는 숙명이 참으로 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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