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Mar 01. 2017

나는 오늘 좀, 꼰대가 되어야겠다

가끔은 반드시 그래야겠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바로 꼰대다.


즉, 사람들은 꼰대를 수없이 마주하지만, 정작 내가 꼰대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꼰대를 만나 기분 나빴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라고 한다면 아마 밤을 새우고도 남을 것이다. 반대로, 꼰대 짓을 한 걸 기억해내라 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부터 칠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왕년'을 이야기하거나, '요즘 애들'을 언급하거나, 자기의 고집을 윗사람이라고 해서 앞 뒤 안 가리고 관철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사회생활을 많이 하다 보면, 스트레스는 위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게 된다. 그것은 동료로부터도 오고 나로부터도 온다. 게다가 그것은 아래로부터도 오는데, 이것을 영 받아들이기 힘들다. 적응도 잘 안된다. 그리고 섣불리 대응하면 영락없이 '꼰대'소리를 듣게 된다. 나와 다르다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작업에 있어서, 우리는 아랫사람에 대해 다그치거나 호통을 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베어 나온다. 아랫사람에게 받는 도전이 못마땅하고, 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네의 수직적 관리체계도 한 몫한다. 게다가 윗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지 않나. '꼰대'가 되려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당장에 답답한 후배를 보고 '욱'하더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내가 솔선수범을 보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어쩌면 사람을 (위/ 아래를 막론하고)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량을 높인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난 오늘 꼰대가 좀 되어야겠다.


정신에 문제가 없는 한 누구도 범죄를 일부러 저지르려 하진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하지만, 우발적인 것을 제외하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어떠한 범법 행위를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이유가 있다. 분명 어떠한 배경이 있고, 동기화된 사건이 있을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꼰대'가 되거나, '꼰대'임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내가 오늘은 좀 '꼰대'가 되기로 '결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외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나는 우리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가능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인턴으로 데려오고 있다. 여기 현지 친구들과 함께 해도 되지만 그 비율을 반반으로 한다. 이곳에 온 친구들이 일도 잘하고, 또 외국인 동료들과도 잘 지내면서 언어나 커뮤니케이션 상에서 자신감을 가질 때면 참 보기 좋다. 그리고 내 일이 바쁘긴 하지만, 그 친구들이 뭐라도 하나 더 얻어가 수 있도록 대화하고 현재 하는 업무를 왜 해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많이 배우는 것이 그리 좋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아니다. 레이저가 나오던 눈, 총기 있는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가늠할 수 없던 '초심'의 크기가 쇠퇴할 때 그렇다. 수많은 인턴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초심이 변하거나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나의 그것을 돌아본다. "초심은 변할 순 있지만, 잃지는 말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사람이 어찌 한결같을 수만 있을까. 때론, 넘어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뛰고, 또 주저앉고... 그럴 수 있다. 사람이니까, 나도 그러니까, 모두가 그럴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온 지 한 달이 막 지난 인턴 한 명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집에 가고 싶다고 통보를 했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였다. 그래, 몸이 아픈 건 당연히 만사를 제치고 해결하고 돌봐야 할 것이다. 응급실이나 병원을 권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정 힘들면 휴가를 원하는 만큼 내고 쉬라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계약서 상으로는 아직 5개월이 남은 즈음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다른 부서에 있는 한 직원과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직장에서 흔히 있을법한 일이었다. 그 이야기에 대해 물었고, 갈등이 생긴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조언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좋은 경험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친구가 택한 건 '회피'였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설득하려 했지만, 또다시 몸이 아프다는 논리를 내세우니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로 몸이 아파 돌아가려 하는 것이 아님을, 그것은 그저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보다 그 친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난 그 친구의 초심을 보았었고 또 결의에 찬 다짐이 아직도 기억이 나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이제 좀 일을 가르치고 함께 일해볼까 싶었던 찰나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니 정말 당황스러웠다. 스스로 '꼰대'가 되기로 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요즘 애들'이란 말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요즘 젊음들에 대한 아쉬운 몇 가지도, 지나간 인턴 후배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그래서, '꼰대'로서 아래의 몇 가지를, 그 친구와 우리 젊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시대의 탓을 하되 자신을 저버리진 말아야 한다.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을 해도 안된다는 말. 일리는 있다. 저성장의 시대, 그리고 부와 기회의 양극화는 젊음의 에너지를 억누르고 있다. 에너지를 발산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며, 불공평한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시대의 탓을 해도 좋다. 그 옛날 통기타를 치며 낭만을 부르짖던 옛 세대의 그 시절과, 우리는 다르다고 그렇게 항변할 수 있다. 다만, 시대의 탓을 하며 자신을 저버리진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합리화가 되고 내 모든 어려움에 대한 손쉬운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변명 뒤에 숨어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탓'을 하는 순간, 그것이 모든 것이 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잃는 것이 더 많아진다. 시대가 이렇다고 해서 '노오력'은 안 하더라도 '노력'조차 하지 말란 말은 아닌 것이다. 할 건 하고 '탓'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내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시대의 탓을 하더라도, 시대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진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둘째,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책임은 지어야 한다.

온 지 한 달 밖에 안된 친구가, 초심이라는 글자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멀쩡히 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과연, '요즘 애들'이란 생각이 순간 떠올랐다. 눈빛과 목소리는 당당했다. 인터뷰를 할 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색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제안하고 나서도 집에 가고 싶다 했을 때, 난 순순히 허락을 해줬다. 이미 마음이 떠난 친구를 붙들고 일을 하고 싶진 않아서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엄연히 6개월이라는 인턴과 회사의 '계약'이 성립된 상황이고,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포부와 초심을 믿고 채용한 터였다. 정말 몸이 아팠다면, 이러한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거나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란 걸 누구나 잘 아는 마당에, 이 친구의 결심과 행동거지는 '책임감'이란 온데간데없는 철없는 치기에 지나지 않았다.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다음 사람이 구해질 때까지, 또는 일정한 시간의 여유는 고려했겠지만 이 친구는 하루빨리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가는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남은 시간 어딘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렇게, 할 말은 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건 변함없이 이어지는 덕목이다.


셋째, '해야 할 일'이라도 일단 멋지게 완수해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란 말이 위로가 되는 시대다. 이 말을 들으면, '그래,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들고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선 하고 싶은 것을 발굴해내어 대박을 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리고 그런 사례는 자기계발서에 적혀 나오거나, 온라인 기사 등에 대서특필 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젊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영 틀리거나 대충 하거나 등한시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사람은 오히려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더 발전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 유명 강사가 말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은 '강의'라고. 하지만 '가장 하기 싫은 일 (즉, 해야 하는 일)'은 '강의 준비'라고 말이다. 모든 일에는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 '해야 할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그것은 내 것이 된다. 좋아하는 일과 더불어 또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역량'이라고 한다. 좋아해서 기를 수 있는 '역량'에, 해야 해서 얻은 '역량'이 더해지면 우리의 경쟁력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이라면 멋지게 완수해보자. 그래봐야 한다.




더불어 몇 가지. 조급해하지 말아야 하고, 길게 봐야 한다. 또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지금 만나는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오늘 그만둔 그 친구를 어디서 만나거나 누군가 내게 그 친구에 대해 어떠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이전 인턴 친구에 대해 물어오는 회사가 있었지만, 난 포장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전한 바 있다. 사람이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결코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적으로 잘했다고 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 않을뿐더러, 못했다고 해서 있는 것을 없다고 이야기할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스스로 반성도 많이 한다. 결국 왠지 모르게 다 내 탓인 것만 같고, 내가 어떻게 했었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란 질문도 스스로 해본다. 이와 같은 후배나 아랫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어렸을 적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엇이다. 돌이켜 내가 어렸을 때 선배들에게 한 행동을 더듬어보니, 난 선배의 진심 어린 충고를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꼰대라고 몰아세웠던 '역꼰대'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돈다. 그리고 내가 위에 쓴 모든 글과 생각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로 향함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은 스스로 '꼰대'가 되어보길 잘했다.

나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

무언가 또 새로운 다짐이 생겼으니.




참고 글: "역(逆)꼰대의 탄생"

참고 글: "인턴이 알았으면 하는 몇 가지"

매거진의 이전글 일 잘하기 프로젝트 #2. 수렴적 일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