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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18. 2017

오슬로에서 그렇게 뭉크를 만나다

오슬로를 빛내는 빛나지 못했던 삶

먼저 뭉크에게 사과를 하고 시작한다.

호기롭게 각진 얼굴의 그의 자화상은 나에게 '마초'를 떠올리게 했고, 연달아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화법과 주제들은 여성에게 '군림'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을 거라는 추측. 이미 굳어진 선입견으로 바라본 작품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물론, '절규'라는 작품 외에는 뭉크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無知)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 가끔은 선입견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작품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위안이 필요할 때. 뭉크 박물관을 오슬로 여행 둘째 날의 첫 목적지로 삼은 이유다. 

뭉크의 자화상


오슬로 패스로 이동을 하고, 그것으로 박물관의 티켓을 교환한다. 삼엄한(?) 시큐리티 check를 한 후 들어서면 입구 우측에 지하로 안내하는 표식이 있다. 뭉크의 삶을 조명하는 영상실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화면을 채운다. 그리고 또다시 영상실 바로 앞에는 맹인들을 위한 그림이 몇 점 벽에 걸려있다. 제목이 점자로 찍혀있고, 작품 또한 입체로 만들어 손길을 따라 그것을 느끼게 해놓았다. 세심한 배려지만, Main 관람실로 들어서면 더 이상 그러한 배려는 없다.

보안 검사를 거치고 나면 공항 게이트와 같은 또 다른 문을 만난다.


판타지, 외로움, 혼돈, 깊숙함과 끝.

그의 작품을 열거해 놓은 순서지만, 결국 그의 인생의 결과이자 요약임을 누구든 알 수 있다. 작품을 보고 나서 알게 된 놀라운 두 가지.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가 이곳엔 없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삶은 나약하고 처절한 곳에서 시작되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했다는 것. '절규'라는 작품은 다행히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 소장이 되어 있어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의 불행했던 삶을 모르고 바라봤던 설익은 선입견에는, 다시금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표현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반 고흐와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 인상주의에도 큰 공감을 하여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인상주의 색채가 묻어난다. 반 고흐와는 정규 수업을 완벽히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어간 비운의 천재라는 맥락에서는 그 궤를 같이한다.

인상주의 점묘법이 돋보인다.
오른쪽 위, 가정부의 딸과의 자화상. 60대였던 그와 17살의 소녀.


이어지는 여성 혐오. 그 안에서 발견되는 스스로에 대한 혼돈과 분노.

앞서 '마초'의 이미지로 여자들을 들었다 놨다 했을 것으로 오인한 바 있지만, 뭉크의 여인들을 돌아보면 오히려 그가 들렸다 놓이는 부침을 더 겪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질투가 그의 작품에 그 색채보다 강렬하고, 80 평생을 독신으로 산 이유다. 유부녀를 탐했던 첫사랑부터 마지막이라고 추정되는 가정부의 17살 딸까지. 하지만 1944년 1월 23일, 그의 80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달뒤 그가 숨을 거둘 때는 그 옆에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여성을 모델로 삼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맞이했지만 여성들이 떠난 근간은 그의 것이었다. 유전적인 결핵, 나약한 신체와 정신. 정신병까지 앓았던 그를 끝까지 사랑해줄 여인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광적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으로부터는 손에 총상을 입는 일까지 겪었다.

보헤미안을 사랑한 뭉크의 여성에 대한 질투. 그리고 여러 남성을 두루 섭렵했던 Dagny를 모델로 그린 '마돈나'
뭉크의 많은 그림에서 아담과 이브를 모티브로 한 그림이 많다. 여성은 '악'을 따는 존재로 그려내지만, 결국 사과를 받아 든 아담의 죄책감을 자신의 그것과 동일시한다.
'남자의 뇌'란 작품. 역시 뭉크도 남자.
뭉크를 광적으로 사랑했던 Larsen이란 여인으로부터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손에 총상을 입는다. 이후 여성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한다.
[좌] 뭉크 미술관의 마돈나. [우] 국립미술관의 마돈나. 판화 버전에는 양 끄트머리 올챙이 모양의 정자 모양과, 좌측 아래 태아의 모양이 있다. 빨간색은 베레모처럼 보이지만 '후광'이며 문란한 여성에 대한 질투와 아름다움에 대한 오마주가 공존한다.




그는 불완전했다. 결핵으로 죽어나가는 가족들을 바라본 그의 어린 시절이 그랬고, 연인들과의 불행한 사랑은 그를 더욱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원인을 자신으로 몰아 '절규'와 같은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작품을 그려냈다. 그것은 모든 현대인의 불안함을 대신 끄집어내 준 대표작으로 불린다. 그가 불완전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그의 '절규'와 더불어 만나게 된다. 예술의 힘이다.


오슬로에서 그렇게 만나게 된 뭉크.

뭉크 미술관은 그의 탄생 100주년에 이르러 설립되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작품을 오슬로시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불완전했던, 빛나지 못했던 그는 오슬로와 노르웨이를 그렇게 환하게 빛나게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했고 마음껏 절규하게 했다. 그러니, 그의 불완전함을 보고 쉬이 그가 불행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아픈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그의 희열을 내가 알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어설프게 돌아봤다고 해서 그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 어쩌면 설익은 편견일 수 있으니.


평온해 보이는 시골길과 같지만, 제목은 '살인'이다. 저기 길 위에 쓰러진 사람이 보인다.
왼쪽은 익사하고 있는 어린이. 오른쪽은 그 어린이를 둘러업고 뛰는 사람을 그렸다. '죽음'은 뭉크의 흔한 소재였다.
뭉크도 '이상'을 품었다. 구름을 타는 사람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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