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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2. 2017

본(本)을 간직한 본(Bonn)

베토벤이라는 수호신이 지켜주는 도시


- 여정 -


암스테르담 To Bonn (291km, 1박)

(Drachenfels 경유)

Bonn To 암스테르담



토요일 회의 소집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월급에 의지하는 나로서는 '불쾌하다'라는 말을 쉬이 입밖에 낼 수가 없다. 주말 회의 소집이라는 현상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신호이자 문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 사람의 경영방식. 조금이라도 상황이 좋지 않으면 누구라도 쉬거나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철학)

좋은 점은 있다. 주말을 그래도 조금은 더 일찍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주말을 전부 쉬어도, 한국 사람의 피가 서린 나에게는 뭔지 모를 꺼림칙함이 있긴 하다. 평생 고쳐지지 않을 강박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 생에엔 복지가 잘 구축되어 주말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길 바라본다. (요즘엔 네덜란드 오리로 태어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진심으로 알아보고 싶다.)


독일의 '얼'이 서린 Bonn으로


토요일 회의를 마치고도 가족여행을 하게 된 건, 누군가의 초대 때문이었다. 지인이 독일 뒤셀도르프에 작은 사업체를 오픈한 것이다. 개업식을 참석하러 뒤셀도르프로 가는 김에 주변 어딘가에서 하루를 묵을 참. 뒤셀도르프는 암스테르담에서 2시간 거리라 부담이 없어, 예전에도 뒤셀도르프를 들러 쾰른에 다녀온 적도 있다. 토요일 회의까지 마친 터라 어디론가 훌쩍 가고 싶은 욕망은 더 커져서, 지인의 개업식을 빌미로 그렇게 가족 여행은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어디로 가요?

응, Bonn에 가려고.

Bonn? 그게 어디예요?

응. 독일이야.

우리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응? 가족 여행을?, 아니면 독일을?


그러고 보니 2주 전에 이미 베를린을 다녀온 터였다.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한 것이다. 게다가 둘째 녀석은 친구의 생일에 초대를 받았다가 금번 가족 여행 때문에 취소를 해서 더 그런 것이다. "우리 노무 자조 가능거 아니에여?"라고 조금은 혀 짧은 소리로 반문할 때 나와 와이프는 한껏 웃었다. 짧은 혀로 말한 것 치고는 느낌이 조목조목 하고 따박따박했기 때문이다. 가끔 예상치 못하게 제 생각을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렇게 커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보지 않은 곳을 후보로 나열하고, 1박 2일을 위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를 고려하고, 또 그래도 의미 있는 곳을 꼽다가 결국 Bonn이 선정되었다. 쾰른 또한 다시 한번 더 물망에 올랐다가 가보지 않은 곳을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Bonn이 간직한 아픔


1989년에 이르러 본은 도시 창립 2천 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니, Bonn은 독일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독일의 '기본'이 되는 곳이라 해도 좋다. 12세기 로마 병영지의 구축을 기원으로 보지만, 그 범위를 확대하면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의미에 따라 2천 년 정도이거나, 2천 년 이상이거나. 그러니, 누구보다 깊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들에게 인생의 우여곡절을 쉬이 기대할 수 있듯이, Bonn 또한 그러하다. 요충지에 위치해 흥망을 겪을 수밖에 없던 Bonn은 불타고 강탈당하는 역사를 반복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도 겪고 만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도시의 30%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4천 명의 Bonn 시민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후의 일이다. 더불어, 1949년엔 동서독이 갈리며 서독의 수도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통일 독일의 '수도'를 재선정해야 하는 논쟁 속에서 Bonn은 1999년 그 타이틀을 베를린에게 양보해야 했다.

Bonn 시청사 광장
시청사 건물
계단만보면 아이들의 가위바위보 게임은 시작된다.


베토벤이라는 수호신이 지켜주는 곳


그럼에도 Bonn이 초라하지 않은 것은 바로 '베토벤'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고담시티를 배트맨이 지켜준다면, Bonn은 베토벤이 지켜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 곳곳에 베토벤 동상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수호신과 같이 말이다. 베를린에 널려있는 '베를린 곰'과 같은 모양새이기도 하다.

Bonn의 수호신. 베를린 곰, 그리고 벨기에 오줌싸개 동상이 동시에 생각난다.


호텔은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 벌써 우리는 베토벤 생가를 지나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에 도착한 터라 입장은 다음날 아침을 기약해야 했다. 우측에는 호텔 이름이 '베토벤'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작은 통로의 '베토벤 하우스 근처 Central Galerie' 호텔이 있었다. 좁은 통로로 오르는 동안, 삐걱거리는 바닥의 소리가 이 건물의 대략적인 나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리셉션에는 건물의 나이와 매우 잘 어울리는 인심 좋은 독일 아저씨가 있었고, 독일 사람 치고는 꽤 괜찮은 영어로 이것저것을 안내해주었다. 중간중간 '아침'을 '모닝'이 아닌 '모건'으로 발음한 것 빼고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방으로 올라가는 곳곳에 베토벤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동상과 흉상, 두상은 물론 초상화들이 곳곳에 있었다.

왼편 아래 호텔 작은 입구
유럽여행에서는 건물 사이로 보이는 성당의 첨탑이 설렘의 즐거움이다.
베토벤 광장에 서있는 베토벤 동상
베토벤 동상, 광장, 대성당


일요일 오전엔 전날 가보지 못한 베토벤 하우스를 방문했다. 베토벤이 태어난 곳에는 그이 수많은 흔적이 있다. 소장가치로는 으뜸인 이곳은 안타깝게도 사진 촬영을 금지해 눈으로만 모든 것을 담아야 했다. 그의 친필과 악기부터 베토벤의 머리카락, 그리고 죽은 후 몇 시간 후에 얼굴을 본뜬 석고상까지. 아버지로부터 엄하게 자란 베토벤은 형제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천재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라는 뻔한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이 어쩌면 베토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가족사는 처참했다. 피아노를 치게 하기 위해 감금은 물론, 천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들의 나이를 2살 어리게 기재한 것. (베토벤은 나중에야 자신의 제 나이를 알았다고 한다.) 형제들은 그가 어렵게 작곡한 작품들을 몰래 팔아 재끼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오래된 호텔보다 더 요란한 삐걱거림의 소리를 내는 베토벤 하우스의 별채에는 디지털 체험관이 있다. 3D 안경을 끼고 오페라의 일부를 감상하는 곳인데, 관객이 일부 그래픽을 조정함으로써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베토벤의 탄생이자 걸작과 고난의 시작.



도시를 벗어나 Bonn을 내려다보는 곳으로


Bonn의 중심가는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한 때 쟁탈전이 이뤄질 정도로 긴박했던 곳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소소했다. 베토벤으로 시작해, 베토벤으로 끝나는 여정이 그렇고 일요일 오전부터 각 광장에 들어선 다문화 행사들의 북적임이 그랬다. 도이치 텔레콤과 도이치 포스트의 본사가 있는 곳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Bonn을 둘러보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발길은 Bonn에서 조금 더 남쪽인 Drachenfels로 향했다. 용이 살았다고 정해진 성이자 요새로 Bonn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경이 있는 곳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간이 열차를 타고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클래식한 느낌의 전차가 맘에 들었다. 덜컹 거리며 올라가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실제로 걸어 올라가면 얼마나 힘들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기차를 타는 것 자체에 들떠 있었다. 나와 와이프도 그러기는 마찬가지.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Bonn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날씨도 뒷받침해줬고, 기분 좋게 북적이고 소란한 사람들의 그것도 주위와 어울렸다.

두 정거장을 거쳐가면 정상이다.
덮개로 덮여있는 곳이 갑자기 조종석이 된다.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강을 따라 저기 우측에 Bonn의 시내도 보인다.
아이들에겐 그저 어디든 놀이터.


위를 마음껏 둘러본 후,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아이들도 배고프다고 아우성. 야외에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고 샐러드와 감자, 그리고 커리 소시지를 즐겼다. 와이프는 맥주 한 잔을 아주 맛있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주차 티켓 기계가 말썽이라 한 참을 실랑이 했고, Drachenfels로 향하던 길에서는 내비게이션이 오락가락하면서 수십 킬로를 헤맸다. 그 와중에 발현된 나의 짜증은 와이프를 바짝 긴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는 와이프 덕에 '욱'하는 성질을 많이 자제할 수 있고, 그 짜증을 누구에게 전가하기보다는 스스로 잠재우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럼에도 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와이프는 아직도 긴장이 되는 거였다. 와이프의 맥주 목 넘김을 보면서 그제야 비로소 일련의 것들이 떠오른 것이다.



하늘 높은 청명한 날씨. 적당한 기온. 푹신한 의자. 허기를 달래줄 음식. 저희들끼리 신나서 노는 아이들.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모든 것을 잊겠노라는 무언의 목 넘김을 하는 와이프. 그저, 가족여행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이는 순간이었다. 나와 살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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