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에 속아, 브뤼헤 저녁 산책
- 여정 -
암스테르담 To 벨기에 브뤼헤 (265km, 1박)
벨기에 브뤼헤 To 프랑스 옹플레흐 (385km)
프랑스 옹플레흐 To 프랑스 몽셸미셸 (227km, 1박)
프랑스 몽셸미셸 To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359km, 1박)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 To 암스테르담 (516km)
예상 도착 시간 저녁 9시 30분.
암스테르담에서 저녁에 출발한 우리는 그리 조급하지 않았다. 여름의 햇살이 밤 11시 가까이 되기 전에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름은 그래서 좋다. 햇살에 속아 밤늦은지도 모르는 그 순간. 속아도 기분 좋은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 더불어, 저녁 늦게 출발한 탓에 차가 막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예상한 도착시간은 저녁 9시. 결국, 내가 맞았다.
여행의 시기를 잡기 힘든 건 과중한 업무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 잡기가 더 어렵다. 직장인으로서,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나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내가 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 그리고 상사와의 미팅 일정 등. 그 수많은 변수를 요리조리 피해야 비로소 '여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가족 여행을 좋아하는 와이프와 두 녀석 덕분에 '(너무 갑작스러운) 변수'와 같은 여행 일정에도 의연하다. 이동하는 와중에 동선을 짜고 호텔을 예약하는 건, 이제는 그것마저 재미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다시 찾아가는 여행. 정신없이 다녀왔던 곳, 날씨가 아쉬워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곳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브뤼헤나 겐트를 갈 때면 어김없이 비가 왔었다. 가족끼리 가거나, 지인을 모시고 가거나, 여러 번 가봤지만 하늘은 꾸물꾸물했고, 비는 부슬거렸다. 그렇다고 그 도시의 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나, 그렇게 멋진 곳에서 즐기는 햇살이 어쩐지 더 간절함은 누구라도 부인 못할 것이다.
드디어 도착한 브뤼헤 호텔.
밤 9시지만 아직도 밝은 그곳엔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고 우리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브뤼헤를 상쾌하게 걸을 수 있었으니. 구름이 좀 있었지만, 저녁 9시의 햇살도 오후 5시 경의 햇살이라 속아주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호텔 바로 앞에 차분한 운하가 우리를 반겼다. 내 휴대폰 카메라는 그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브뤼헤가 지금과 같은 중세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 어쩌면 브뤼헤가 겪은 고난 때문이다. 13세기 최대 무역항으로 그 명성을 떨쳤지만, 퇴적 작용으로 그 바닷길이 막히면서 안트베르펜에 그 명성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개발이 더뎌지면서 그 시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고 지금은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으니 바닷길이 막혀 쇠락했던 그 경험이 지금의 브뤼헤를 있게 한 것이다.
유럽의 거리는 어디를 가도 좋다. 원근법을 근간으로 하는 유럽인들의 사상이 느껴지고, 그것은 어디든 소실점으로 발현된다. 어느 한 곳으로 모여지는 수렴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 첨탑의 등장은 유럽 여행의 묘미다. 자신 있게 사진을 찍으라는 듯이 가지런함과 오래됨, 그리고 거대한 건물의 등장은 마주하기 유쾌한 풍경이다.
맥주와 초콜릿. 벨기에의 상징.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르크트 광장은 브뤼헤의 상징이다. 그곳엔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자리한다. 건물 색이 네덜란드와는 다르게 알록달록한 파스텔톤이어서 좀 더 경쾌하다. 여기에, 13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세워진 브뤼헤 종루는 높이 84m의 거대함을 자랑한다. 그래서 브뤼헤를 돋보이게 한다. 47개의 종소리는 15분마다 울리는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다. 직접 들어보면 과연 그렇다.
광장을 지나 사이사이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시간 여행을 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골목골목은 끝이 없어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느낌이다. 걷고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러다 시간에 갇힐지도 모르겠다는 우스운 두려움마저 든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매력이 끝이 없다는 말이다. 광장 뒤편 운하 어느 한 레스토랑에서는 이제 막 해가 지는 그 시간에 경쾌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듯한 그 개인 연회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밴드의 음악이 주위를 울렸다. 그리고 가지런한 건물과 운하, 뉘엿한 해와 그래도 아직은 푸른 하늘로 녹아 사라져 갔다. 그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해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는 아이들을 위해 호텔로 발을 돌렸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이동하기 전 브뤼헤를 둘러볼 것이라 위로하면서.
다시 찾은 브뤼헤는 그렇게, 비가 오지 않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마치, 13세기부터 우리를 기다려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