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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19. 2017

직장생활, 사방이 적(敵)이다.

결국에 끝까지 남는 내편은 나 자신이다.

오전 7시였다.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오전 7시라는 이른 시간에 온 전화이니 그 다급함이 느껴진 것이다. 마침, 출장길에 올라 다른 나라로 가는 기차를 막 타려 했던 때였다. 이제 막 플랫폼을 올라야 하는 찰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붙잡고 통화하느라, 그리고 다른 손에 걸쳐 있는 캐리어를 끄느라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그 정신 사나운 틈에도 분명히 기억나는 건, 전화 건 사람이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저 혼자 화를 내고 소리를 친 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어서 전화를 끊은 내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는 것.


기차 안, 와이파이가 되는 탓에 결국 메일을 열어본다.

여기에도 다급하고 중요한 메일은 넘쳐난다. 메일 하나하나를 열어보면 사방이 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부분이 issue이거나 안 되는 일이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초래할 것들의 향연이다. 직장인이란 굴레에 갇혀 각자 저희들만의 KPI 이상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 틀에 갇혀 보낸 이메일들엔, 상대방에 대한 배려란 찾을 수가 없다. 이럴 거면 비행기를 탈걸 그랬다. 최소한 이동하는 몇 시간만큼은 이런 적들의 화살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오전에 전화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동기였다. 다른 지역의 나라에서 일하는 그 친구의 거래선이 내가 담당하는 나라에서 어떤 작업이 필요하기에 도움을 요청한 거였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process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정중히 설명을 했지만, 당장 앞이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그 녀석은 소리를 치고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다. 측은했다. 감정이 달아올라 전화를 끊어버린 그 친구는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까. 전화를 먼저 끊어버린 그 순간, 칼자루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게 와 있으니. 그리고 십수 년을 직장 생활하고서도 이렇게 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의 동기라는 것이, 그 친구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 순간, 웃으며 직장 생활을 같이 시작한 동기 녀석도 바로 적이 되는 순간이니, 이런 상황을 맞이한 나 스스로에게도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동기라는 끈끈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과는 어떠할까. 위로, 아래로, 옆으로 그리고 때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부서나 조직과도 갈등이 생기고 서로를 겨냥한다. 아생연후(我生然後)의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곳이 직장이니 그런 것이다.


다시, 사방이 적이다.


직장 생활이 힘든 건 '일'때문만이 아니다.


만약, '일'이 잘된다고 해보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진척이 빠르며 그것으로 인해 칭찬받는다면 어떨까. 아마 주말에도 직장에 나와 혼신의 힘을 다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란 결국 사람과의 아웅다웅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나하나 잘났다고, 나하나 무언가를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해서 굴러가는 성격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관계다. 이게 바로 직장 생활의 시작이자 끝이고, 힘든 직장 생활의 원흉이다. 내 편하나 있기는커녕,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람/ 상황에 둘러싸여 있을 때의 외로움이 그것이다.

물론, 일과 함께 인간관계 그리고 조직생활을 잘 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을 다 만족시키는 건 신이라도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신은 직장생활을 안 하는 것으로 세상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는 물론 일도 잘하는 사람들을 보아왔고, 나 또한 그것들을 지향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절대 '적'을 만들어선 안된다.

이 말은 선배들에게서도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깨달은 바다. 앞서 언급한 동기 녀석처럼 순간의 감정을 못 이겨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행위는 '적'을 양산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미 '적'이라 할지라도, 굳이 다시 '적'으로 못 박을 필요는 없다. 앞서 이야기 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절대 적을 만들어선 안된다'라는 깨달음의 실천이다. 문제는, 적을 양산하지 않아도 적이 있다는 것이 직장생활을 힘들게 한다. 누구에게 화를 낸 적도 없고, 공격이 가득한 메일을 보낸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냥, 직장이라서 그렇다. 자신이 먼저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의 KPI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직장생활은 '사방이 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인격적으로든, 아니면 KPI 때문이든, 어떠한 상황이든 간에 갈등과 충돌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적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해결해 나아갈까를 고민하는 편이 더 낫다. 때로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그저 그 역할을 다하느라 악의적이 아닌데도 누군가 나의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적'을 규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악의적인 '적'과 그렇지 않은 '적'은 그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을 분류하고, 그에 맞는 대응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직장인에게 있어, 낭만적인 솔루션은 없다. 그저 참고 사는 거다. 다만, 그 참는 순간에서 오는 '배움'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있어야 한다. '배움'이 없으면, 참다가 화병만 난다. 그리고 '적'은 양산하지도 말고, 규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직장에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팀을 꾸리고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바보같이 그저 헤헤 웃으란 말이 아니다. 화병을 키우란 말이 아니다. 다시 보지 않을 정도, 선을 넘을 정도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선이 '감정의 선' 이어선 안된다. 그 '선'에 대한 감은 아쉽게도 경험이 쌓이다 보면 안다. 여기서 단 몇 줄의 글로 적어 남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조언을 줘야 한다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적'을 만들고 규정하진 않되, 분류하고 대응하는 것에 예의 주시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악의적인 사람의 공격은 날카롭거나 무디거나 둘 중 하나다. 날카로운 경우는 나를 타깃으로 삼고 철저하게 준비한 뒤 공격하는 것이고, 무딘 경우는 그저 감정에 휩싸여 어설프게 돌격하는 경우다. 당연히, 전자의 공격이 후자의 공격보다 고급지다. 하지만, 후자의 공격을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자칫, 본인 또한 감정적으로 되받아 칠 경우 논리와 해결책은 저 멀리 사라지고 결국 이전투구(泥田鬪拘)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여기에 말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에 바로 맞받아치는 경우가 있다. 다만, 그 대응 방안을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거나, 되받아치는 메일을 쓰고 난 뒤 저장함에 두었다가 10분 후에 다시 읽어보는 방법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보인다. 진흙탕 속에서 최대한 그것을 묻히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차분함이 말이다.

이와는 다르게 나를 타깃으로 삼고 철저하게 준비한 공격을 받았을 경우, 내가 준비가 안된 상태라면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 두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의 과한 방어는 자칫 나만 바보가 되는 경우가 많고, 어설프게 감정적으로 대했다가는 논리 없는 사람, 동시에 제 감정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철저하게 숫자를 준비해오거나, 이메일 등의 증빙을 들이밀었을 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어설프게 화제를 전환하려는 건 패착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추스른 후 나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 좋다.


때로는, 악의적이지 않은 적도 존재한다. 사실, 그러한 사람들을 '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렇지만, 어쨌거나 내가 받은 '공격'을 두고 봤을 땐 잠시라도 '적'인 셈이다. 다만,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은 간단하다.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해보는 것이다. 물론 쉽진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좀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본의 아니게 내게 온 '공격'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업무 상 process에 대한 불만을 누군가 개선이 필요하다며 언급했는데 해당 상사가 그 process의 담당자인 나를 챌린지 한다. Process상으로 개선이 되어야 할 점을 개선하고 싶은 차원에서 건의한 것뿐인데, 화살이 내게 오는 경우다. 또는, 순수하게 자신의 KPI에 몰입하다 그 KPI와 상충하는 부서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받은 공격보다는 그 과정을 봐주어야 한다. 사실, 악의가 있고 없고는 누구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직장 생활은 참으로 외롭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적'들로 인한 것이라는 것. 나의 편도 물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적'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위의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도 누군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 이미 그렇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 끝까지 남는 내 편은 자신 스스로라는 것이다.


동료들과 즐겁게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직장생활이 사방이 '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이 글은 그렇지 않은 99%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함께 하자는 고민이다. 사방이 '적'인 곳에서, 오늘도 고군분투한 젊음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각자는 끝까지 자기편이 될 자신을 한 번 더 토닥여 주었으면 한다. 좀 더 나은 직장 생활을 위해. 나의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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