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습작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Sep 17. 2017

재미를 인질로 잡았다

세 얼간이의 가볍도록 슬픈 영화, '로마의 휴일'

일단 섞었다.
맛은 생각하지 않고 비볐다.
맛이 나쁘진 않다.


배짱 있게 지은 제목이다. 문득, 검색창에 이 제목을 넣으면 오드리 헵번의 영화가 먼저 나올지 아니면 한국의 세 얼간이가 먼저 나올지 그것부터 궁금했다. 역시 시간의 흐름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 유명한 '로마의 휴일'을 찾아보니 곧바로 예상하지 못한 세명의 조합으로 탄생한 영화가 상단에 뜬다. 오드리 헵번이 아닌 임창정, 정상훈, 공형진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오면서.


한국은 지금 상처가 많다.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그렇다. 결국, 국민이 그러니 나라가 병든 모양새다. 양극화되어가는 사회. 물질은 물론이고 이념까지 그렇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더 없어지니 헬조선이라 불려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념은 좌우로 나뉘면서, 고개를 들어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물고 뜯고 있다. 영화 장르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얼간이와 같은 세명의 조합을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상처 난 우리의 마음을 짚고 넘어가는 글을 쓰고 있는 건, 이 영화가 가진 무게감 때문이다. 가볍게 시작해 점점 더 무거워지는 이 영화의 시간관념은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영화로 치부되기 딱 좋다.


코미디를 표방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비꼬으려고 한 것인지 감독의 의중을 아직도 알 도리가 없다. 블랙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그 시니컬함이 부족하고, 부조리극이라고 하기엔 무게가 너무 가볍다. 갑질 하는 사람과 재벌의 이야기부터, 삶의 무게가 무거운 사람들의 사연까지 그저 그릇에 쏟아부어 비벼버렸다. 비벼버리니 당최 이것이 무슨 맛인지를 모르겠는 거다. 그런데, 그 맛이 나쁘진 않다. 신기하다. 물론, 흥행의 성패와는 별다른 이야기다.


불의로 불의를 응징하면,
그것은 정의일까?


영화 속에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카타르시스는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받아들이는 관객이 속시원히 받아들일 것인지 의아하다. 현실성 없다거나 그저 과장된 코미디로 치부해 감독이 주려고 했던 그 무게감을 못 느끼는 사람도 많겠다. 온전한 무게감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말았다. 지독히 노골적이고, 가볍고 누구나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뭔가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쉽게 넘어가고 만 건 어쩌면 나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많은 상처와 상대적 박탈감이 있다는 거다. 


감독이 택한 건 '불의를 불의로 응징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세 얼간이가 '로마의 휴일' 나이트를 접수하면서부터다. 권력의 방향이 거꾸로 세워졌고, 갑질 하던 사람들이 설설 긴다. 을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사정을 들어주고 내색하지 않으며 토닥인다. 이 낯간지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노골적인 장면 하나하나가 속 시원하다.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다.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스토리도 뻔하지만, 어쩐지 불의가 (선한?) 불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장면을 은근히 기다릴 정도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나라의 주요 기관이 대의나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신양명과 밥줄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장면도 예상대로 빼먹지 않았다.


다시, 이것저것 비볐는데 맛이 나쁘지 않다.

재료가 기상천외하게 훌륭한 건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맛이기 때문이다.



잘난 형이 되어 돌아왔다!


우리에게 친근한 임창정의 모습은 영화 '비트'에서 깝죽대다 정우성의 한 방에 무너지는 그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 무려, '잘난 형'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만큼은 임창정은 정우성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쓰러졌던 그 역할을 다른 배우에게 양보했다. 상대방을 멋지게 쓰러뜨린 장면 다음에, 임창정이 머리로 상상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되었다면 매우 유치한 스토리가 되었겠지만, 어쩐지 멋있는 임창정의 모습도 그리 친근하진 않다. 그래도 임창정이 준 연민과 같은 '을'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따뜻하다.


신파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돈이 없어 가족을 잃은 슬픔을 연기하는 임창정은 진짜다. 웃고 울리고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배우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영화에선 웃기기보단 울리기에 더 집중한다. 내내 짓고 있는 울상과 진지함이, 없는 자의 설움을 잘 표현한다. 없어 보이고, 슬픈 자의 내면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을 마주하기 싫어, 더 멋진 배우에 열광하고 아름답고 동화 같은 이야기에 중독되고 있는지 모른다. 분명 그렇다.


재미를 인질로 잡은 영화


솔직히 재밌다고 추천해주긴 어렵다. 관객수 20만 명 이하의 성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400만을 찍었던 색즉시공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세 얼간이를 보고 '재미'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을 수도 있다. 개연성도 부족하고, 앞서 언급한 노골적이고 예상 가능한 스토리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임창정의 애드리브나 개인기로 그것을 덮기에는 캐릭터 자체가 슬프다. 공형진이 바보 연기로 분투를 하지만 역부족이고, 인질들의 개인기는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마치, '재미'를 인질로 잡고 관객과 지루한 밀당을 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이 '인질'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감독이 비벼준 카타르시스를 맛봤을 것이다. 그 나쁘지 않은 맛이 20만 명을 불러 모은 걸 수도 있겠다. 혹시라도, 관람객인 자신이 '인질'로 느껴졌다고 할지라도 이 영화나 세 배우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족한 개연성과 스토리의 전개에도, 정상훈과 공형진이 다 커서 처음 놀이동산을 신나게 경험하는 모습, 가족을 잃은 힘없는 가장인 임창정이 입양된 자신의 동생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연민이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인질들이 낸 탄원서 속에는 이 영화의 관객 인질이었던 당신의 이름도 분명 들어있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콤하지 않은 쌉싸름함. 라라랜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