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사람 공부가 필요하다 #8
'감정'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은 선천적인 것일까?
후천적인 것일까? 똑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들의 '감정'이 다르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를 험담하는 그룹에 속한 사람 중에는 그 험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내심 불편한 감정을 지울 수 없기도 한다. 두 번째 사람의 경우는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험담했던 것 때문에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개인의 감정 체험, 과거의 기억이나 학습의 영향에 따라 감정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즉, '감정'은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시조인 왓슨의 공포 조건화 실험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왓슨의 공포 조건부여 실험
생후 11개월의 어린아이에게 실험용 흰 쥐를 보여준다. 어린아이는 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흰 쥐를 만지려 한다.
이때, 큰 소리를 내어 아이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흰 쥐를 만지려는 아이에게 이것을 반복한다.
어린아이는 깜짝 놀라 울고, 이제는 흰 쥐만 보아도 고개를 피하고 두려워한다. 이 조건이 더욱더 강화되면 그 아이는 토끼나 개, 심지어는 솜털 등과 같이 흰털 달린 생물이나 물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중립 자극이었던 흰 쥐에 대해, 큰 소리라는 조건을 부여하여 아이가 놀라는 조건 형성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것만 보아도 놀라거나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 일반화'가 성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왓슨은 "나에게 한 다스의 아이들과 특수한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원하는 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라고 까지 했다. 즉, 사람들의 감정 반응은 고전적인 조건 형성을 통해 학습된다고 주장하였고, 아동발달의 단계에서 부모의 역할이 아이들의 감정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확신을 가졌다.
이를 보면 분명 '감정'은 후천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험을 한 아이의 공포가 제대로 소거되지 않았다는 점 (왓슨의 말대로라면 반대 조건부여를 통해 그 공포를 없앨 수 있어야 했다)과 아동의 욕구나 동기를 간과했다는 부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그 허점을 보였다.
즉, '감정'의 형성은 이렇게 선천적이라던가 후천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그 '감정'이 형성되고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감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흥미로운 주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감정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이제 의문을 품는다. 기뻐서 웃는 것인지, 아니면 웃으니까 기쁜 것인지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심리학자인 제임스와 랑게는, 감정 경험은 외부 자극에 대한 신체 반응을 지각한 결과로 생긴다고 주장했다. 즉, 웃으니까 기쁘고 우니까 슬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자극 → 감정 → 신체적 변화" 순이지만,
제임스와 랑게는 "자극 → 신체변화 → 감정"으로 봤다.
이러한 것을 활용한 예도 있다.
호감 있는 이성과 놀이동산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공포영화를 볼 때 빨리 뛰는 심박수가 호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약장사들이 약을 팔 때, 흥겨운 음악을 틀고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은 한껏 들뜨게 하여 사람들의 구매 결정을 좀 더 쉽게 하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캐넌과 버드는 대뇌 아래에 있는 시상하부에서 감정을 주관한다고 봤다. 즉, 슬프다는 감정이 인식되면 이것을 뇌로 전달해 울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론 또한 감정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한 담론과 같이 어느 하나만으로 일어난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심리학은 이러한 주제를 연구하며 우리 미처 인지하지 못한 '감정'의 메커니즘을 파헤치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상반된 '감정'의 극단적 전환,
"카타스트로피 이론"
물이 끓을 때까지 물의 상태를 관찰해보면 물의 상태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끓는점을 넘어서면 물은 요동하고 변함없던 온도에서 근소한 차이의 온도 변화가 액체에서 기체로 급변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급변하는 이 순간을 카타스트로피 이론이라고 한다. 불연속 현상을 다루는 수학적 이론이며, 일명 파국(破局) 이론이라고도 한다.
이 카타스트로피 이론은 심리학에도 쓰이는데, '상반된 감정의 극단적 전환'을 나타날 때 쓴다.
사랑하는 반려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고 반려자를 살해하는 소심한 사람의 경우, 아내를 사랑했던 마음이 미움과 분노로 극단적 변화한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거나 무관심했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순간이다. 사랑하는 애인과 이야기하다가도 욱하며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자신도 모르고 폭발하듯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엔 모순된 감정이 있는 것이다.
한 여름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포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포라는 감정을 피하고는 싶지만, 그것에서 얻을 짜릿함을 위해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감정 가운데 불쾌한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있다가 물이 끓는 그 지점과 같이, 어느 흥분 상태에 이르게 되면 카타스트로피로 발화하는 것이다.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자신만만한 사람이 실패를 맛보자 자살을 해버리는 경우도 그것의 한 예다.
사람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것은 이 모순되고, 극단적 변화를 보이는 감정 때문이다.
그러니 '감정 심리학'에 대해 다루었다고 이제 '감정'에 대해 많이 알았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 변화도 잘 모르는 존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오늘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 왜 그리 마음이 쓰이는지, 쉽게 잊히지 않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별일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감정은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휘둘리고 말뿐인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솔직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