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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7. 2018

직장생활, 모든 것이 라이브다

울렁증은 어쩔 수 없다. 연출자의 관점이 필요하다!

라이브의 어려움


영화배우 이병헌 씨가 '싱글 라이더'라는 영화에 출연했을 때다.

한 생방송 예능프로가 영화 개봉 당시 현수막을 만들어 섭외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사했다. 그 예능 프로의 열혈 시청자이고, 호스트와도 친분 관계가 있지만 아래와 같이 말하며 끝내 출연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생방송 울렁증이 있어서 자신이 없었다. 시상식도 무섭다."


할리우드 진출까지 한 베테랑 영화배우가 이런 말을 하니 의외긴 하지만, 라이브를 부담스러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 녹화 방송이라면 편집으로 회피할 수 있는 많은 어려움들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삶은 항상 '라이브'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고, 이미 지난 과거는 어쩔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NG가 났다고 편집을 할 수도 없다. 인생의 정수가 응축된 '직장'은 그래서 더더욱 생방송 무대와 같다.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무대'가 바로 직장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시간이라면 잠시라도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직장에 출근한 이상 우리는 돌고 있는 카메라 앞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애드리브의 향연 그리고 울렁증


직장생활은 그래서 모든 것이 라이브다.

각본은 없다.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맞추어 대응해야 한다. 그것도 잘. 그렇지 않으면 방송사고로 결론 난다.


각본이 없으니, 각자의 '애드리브'가 난무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애드리브를 날릴까. 나는 왜 이런 애드리브를 날렸지?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생방송이니 생각지 못한 일들이 발생한다. 임기응변과 정치, 각자의 위기 대처 능력은 생방송이라는 상황하에 극대화된다. 각자의 합을 맞추지 않은 어설픈 연기는 서로 상충한다. 그러니 갈등도 많이 생긴다.


생방송 울렁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평소에는 흥이 많고, 대인 관계가 좋은 사람이 회사만 오면 의기소침해진다. 알게 모르게 공황장애를 겪기도 한다. 나도 가끔은 직장에 있는 시간 내내, 발가벗겨져 어느 무대 위에 올라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떠돌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 훅 들어올 때면 더 그렇다.


상사에게 보고를 하거나, 대중들 앞에서 발표라도 하게 되면 이것 또한 영락없는 라이브다. 없던 울렁증도 생긴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한 번 잘못 형성되면 직장 생활 내내 힘들다. 그래서 우리네 직장인은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연출자의 관점에서
라이브의 묘미를


하지만, 이러한 생방송도 잘 이끌어가는 사람이 분명 있다.

카메라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미리 파악하고 있으며 각본은 없지만 축적된 경험으로 적절한 애드리브를 구사하는 사람. 말 그대로 '고수'다. 경험이 그것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생방송도 자주 출연하다 보면 어떤 돌발 상황이 생겨도 잘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출연하는 생방송의 시청률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더불어, 연출 함으로써 조금은 더 주체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울렁증 때문에 카메라조차 쳐다보지 못하면 그 상황은 계속된다. 카메라의 움직임, 사람들의 반응, 내가 어떤 일을 당했을 때의 태도, 주변 세트와 소품까지.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주의 깊게 연출자의 눈으로 살피다 보면 보일 것이다.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의 유형, 어떤 일이 발생하는 빈도나 패턴 등. 그러면 우리는 생방송에서 일어나는 돌발 상황을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때론 라이브의 묘미를 즐기면서.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은 자신의 일생이 생방송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낀다. 어쩌면 트루먼의 각본에 짜여진 생방송은 진정한 의미의 라이브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를 막아서는 연출자가 제시한 안정적인 각본을 버리고, 그는 각본이 없는 실제 삶을 선택한다. 진정한 라이브를 말이다. 삶의 연출자가 되고자 하는 설렘과 함께.


그렇게 우리의 삶은 트루먼이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실제 라이브다. 단지 누가 바랐던 것이라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울렁증을 느끼고 있던 어느 삶의 부분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이미 카메라는 돌고 있다. 우리는 바라던 바라지 않던 무대에 올라있고. 울렁증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연출하는 범위를 넓혀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의 행복과 생존, 그리고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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