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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25. 2018

몸소 체험하고 있는 직장 명언들

'정답'이 없는 직장생활에서 필요한 말들

자고로 배움은 몸소 겪어야 제맛이다.


거짓말 같이 1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직장인이라는 생활을, 그것도 한 회사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남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가끔은 놀란다. 회사에 여러 사업본부가 있다 보니, 마치 다른 회사처럼 돌아가는 이곳저곳을 경험한 것도 크게 감사할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엔 나보다 훨씬 더 이 생활을 오래 한 분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제 사회 초년생이 되었거나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은 분들도 있겠다. 직장 생활을 몇 년 했는지, 그 길이가 모든 걸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진 않는다. 그런데 경험을 돌아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이 쌓이니,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기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무작정 경험하는 것이 자산이 되는 것처럼, 직장인의 경험도 쌓고 쌓으면 소중한 무엇이 된다. 단, 젊었을 때의 경험은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즐거운 탐험이라면, 직장인의 그것은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생존게임이다.


그리고 배움이란 몸소 겪어야 체득된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무언가를 몸소 겪고 깨닫고 나면 변한다. 변화의 기적은, 그러니까 직접 겪고 깨달아야 일어난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배움은 나 자신을 낮출 때 더 극대화된다.

수십 년을 반복한 직장 생활 중에,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면 후배들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동료나 상사로부터 배우는 것은 기본이다. 직장 생활을 꽤 하다 보면, '저렇게 해야지'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를 구분하여 받아들이는 내공이 쌓인다.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이코 같은 사람에게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 자세로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야기들을 돌아보면, 가슴속에 울림은 더 커진다.


첫째, 아생연후(我生然後)

"너, 그 사람 몰라? 아생연후에 충실한 사람이야 그 사람!" 입사 3년 차. 사원 막바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부하직원은 나몰라라 하는 상사를 보며 선배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이기적이고 리더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은, 그 상사의 정면에선 온 데 간데없었지만 역시나 뒤에서는 많은 수군거림들이 있었다. '나 먼저 살고 보자'는 뜻의 '아생연후'는 그렇게 내 머릿속 직장인 생활사전에 기록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아생연후'가 그렇게 나쁜 단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에겐 '미덕'이 아닐까.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직장 생활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반성이 필요하다. '아생연후'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오해받는 경우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나몰라라 하는 사람이나, 의도적으로 남을 짓밟는 사람 때문이다.


둘째,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마라

신입사원 시절에 같은 부서 차장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겪어 보니 과연 그랬다. 출근을 하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잠시 인정받아 내 세상인 것 같다가도, 이곳저곳에 놓인 지뢰를 밟고는 여지없이 깨지고 나면 한 없이 서럽고 슬프다. 그러다 다시 웃을 일이 찾아오고는, 또 근심 걱정이 몰려온다. 그러니, 잘 나간다고 희희낙락할 필요도 없고, 못 나간다고 슬퍼할 일도 없다.

다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가끔은 '일희'하고 '일비'한다. '일희'를 통해 자신감을 키우고, '일비'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한다. 솔직히 '일희'보다는 '일비'가 많은 직장 생활에서, '일희'는 소중한 선물과도 같다. 그러니 그것을 만났을 때 극대화해서 느끼고, 그 기운을 살려 자만하진 않되 성장을 위한 에너지로 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셋째, 운칠복삼 (運七福三)

'운칠기삼'이 아니다. '운칠복삼'이다. 사회 초년 시절에 임원이 된 분과 함께할 자리가 있으면, 난 당돌하게 묻곤 했다. 어떻게 임원이 되신 건지. 비결이 뭔지. 질문을 들은 임원분들은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주시한 뒤, 각자의 생각을 들려주셨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운칠복삼'이었다. 즉, 운이 좋았다는 말. 자만이 느껴지면서 반대로 겸손함도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대답. '운'이었다는 겸손함과, 자신은 그런 '복'을 타고났다는 말이니까. 비슷한 말로는 '그냥 거기에 내가 있었다'라는 말도 있다. 성장의 시대를 보낸 분들이기에, 이해가 잘 되는 부분이다.


넷째,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 오면, '몸'이 불편한 상황을 택하라.

사회 초년생 때는 참 술자리가 싫었다. 술을 싫어하는 관계로 지금도 술자리는 그렇게 많이 참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자리를 활용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으신 분들과 격이 없이 대화를 나누거나, 편안하게 인간적인 대화를 하며 유대관계를 쌓는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이리저리 모든 술자리를 내빼려던 나에게 부장님 한 분이 진실한 조언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스테르담아, '몸'이 불편한 게 나아.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그것은 내게 큰 울림이었다. 그냥 술자리 가서 몸이 고된 것이 낫지, 몰래 빠진다 한들 들킬까 봐 불안해하고 나중에 불이익을 당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맞았다. 맘이 편해야, 만사가 편하다.


다섯째, 무언가 결정하기에 애매할 땐, 나에게 불리한 쪽을 택하라.

출장을 갔다. 주말에 시장 조사를 했다. 그리고 오후에 잠깐 여유가 있어 골프를 쳤다. 그렇다면 그 날 저녁 식사 계산은 법인 카드로 해도 될까? 주말에 시장 조사라는 업무까지 했는데 당연히 되지 않을까? 이런 상황을 맞이한 임원분들의 짧은 토론이 오갔다. 그중에 가장 선임인 임원분이 말했다. "이럴 땐, 개인이 불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맞아!"라며 각자 개인 돈으로 결제를 했다. 과장이었던 내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네 번째에서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마음 불편하느니, 그냥 떳떳하게 자비로 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더 큰 꿈을 접어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직장이란 곳이, 그리도 무섭다. 누군가를 내치고자 할 때는.


여섯째,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다.

최근에 풀리지 않는 일을 붙들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선배가 해준 말이다.

"참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지? 힘내라!"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갑자기 모든 근심거리가 가볍게 느껴졌다. 명언 중의 명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의 '일'은 사람들이 한다. 그러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런데 또 마음먹고 해결하려 들면 풀리기도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궁합,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 하늘이 돕고 땅이 돕는 영향도, 될 사람은 된다는 자신감. 모든 것이 혼연일체가 될 때 일은 풀린다. 참 재밌는 곳이다. 직장은.


일곱째, 상사는 절대 나를 위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상사도 같은 월급쟁이일 뿐이다.

스스로 깨달은 바다. 얼마 전, 풀리지 않는 업무를 들고 상사에게 갔었다. 내심 윗선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란 걸 보고를 통해 말했지만, 다시 한번 알아서 잘 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마 사회 초년 생이었다면 적잖이 충격을 받거나, 이런 것 하나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저 자리에 왜 있을까란 비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잘 안다. 상사도 (나보다 월급을 좀 더 받는) 월급쟁이란 것을. 그래서 난, 시야를 넓혀 어떻게 하면 그 이슈를 풀어낼까 고민했다. 고민하면 답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슈를 해결했을 때, 나는 더 성장해 있었다.


여덟째, 조급하면 지는 거다.

신입사원 때였다. 고만고만한 동기들을 보면서 조급함이 몰려왔다. 벌써 잘(?) 나가는 것 같은 친구. 나보다 더 인정받는 것 같이 느껴지는 동료. 나는 뭐 하고 있나, 뭘 더 잘해야 하나. 조급함이 몰려온 기억이 난다. 조급함은 사람을 쉽게 망친다. 제 실력을 발휘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내일도 희망도 없는 사람으로 빚어낸다. 지금에야 돌아보면 우습지만, 지금의 나도 동료나 선배 그리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빨리 따라잡아야겠다는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10년 전인가. 모로코 출장 중에 고속도로에서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다. 경찰은 돈을 목적으로 외국인인 우리를 잡은 것이다. 운전을 했던 주재원 선배가 말했다. "야, 이거 돈 달라는 거야. 우리가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더 쉽게 본다. 그냥 의자 젖히고 뒤로 누워서 기다리자!" 정말로, 그 경찰은 10여분 뒤에 그냥 가라며 손짓을 했다. 조급하면 지고, 여유를 가지면 이긴다는 것을 몸소 배웠던 사례다.


아홉째, 직장은 존중받으러 나오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많이 힘들고 아픈 이유는 인격적인 대우를 못 받거나, 존재의 가치를 못 느낄 때다. 하지만 직장은 학교나 학원이 아니다. 즉, 토닥이고 달래며 응원을 해주는 곳이 아니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출근을 하니까 힘든 거다. 반대로, 나는 직장에서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지. 직장은 존중받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아니면, 나 하나라도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주던가.


열째,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너무 유명한 말이라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겠다. 한 가지. 그렇게 직장은 '결론적으로 결과적인 곳'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한다. 매출이나 이익, 성과라는 '숫자(결과)'는 모든 것의 잣대다. 그것에 따라 역사의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 직장에서 승부를 보고 싶다면, 일단 버티자.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비굴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고상하게만 사는 인생은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생각한다.


"내가 나를 응원해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응원해주지?"


직장에선 더 그러하다. 친한 동료나 후배, 그리고 상사. 모두가 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 선의든 악의든 말이다. 적대적으로 볼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맘에도 없는 애정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부대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진정 나를 걱정해 주는 건 나 밖에 없다. 그러니 '나'한테 잘해야 한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잘하고 있다고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자존감'으로 극복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자만 모든 것이 현재 진행 형이다. 하루하루 경험이 쌓이며 되새기는 직장 명언들이 사뭇 즐겁고 흥미롭다. '정답'이 없는 직장생활이라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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