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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4. 2018

성장

생존하기 위해, 결국 나를 위해

"금번 3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xx% '역성장'입니다."


그야말로 갑분싸.

회의실에 모인 임원진들과 그 이하 모든 인원이 숨을 죽인다. 곧이어 '사유'가 나온다. 왜 그런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질책과 호통은 자동 장전되어 격발이 이루어진다. 그 탄환이 누굴 향하게 될지, 월급을 받는 모든 존재는 조마조마하다.


우리는 항상 '성장'에 목을 맨다.

그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마찬가지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표현을 할 때조차 '역(逆)'자를 넣어 굳이 '성장'이라는 말로 조합을 이루는 것이 흥미롭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성장'만 해왔다. 성장의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은 이미 고위 임원이 되어 있거나, 건물주가 되어있다. 시대는 달라졌다. 경제의 흐름은 고착화되고, 사람들은 '포기'라는 말과 친숙해진다. '소확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계급론이 사회에 통용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에서.


성장하지 않는 존재는 도태된다.

회사도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야 하고, 새로운 제품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회사'는 '개인'의 집합체다. '회사'란 이름 자체도 '모일 회, 모일 사'다. 각자의 밥줄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다. 그래서 '회사'가 망하면 '개인'도 그것의 붕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전년대비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이자 반성이다.


그러나 성장엔 한계가 있다.

회사의 성장은 고점을 찍을 때가 분명 있고, 사람의 성장은 20세 즈음에 이르러 멈춘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건, '역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암울한 시기에, 모든 존재는 다시 성장을 향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꾸역꾸역 우리를 살게 한다.


육체의 성장이 멈춘 개인은, 정신적 성장으로 거듭난다.

자기 계발은 육체적으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갈증을, 정신과 지식 그리고 마음의 성장으로 풀어 가는 발전적 본능이다. 직장에선 이러한 '성장'이 자의적임은 물론, 타의적으로도 일어난다. 참 재밌는 포인트다. 원하지 않아도 '성장'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건.


'성장'이란 말은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또한 심미적인 것에도 통용된다.

나는 오늘 어떤 '성장'을 했을까. 지금 살아있다는 건 분명 어느 부분에선가 '성장'을 했다는 뜻일 테다. 다르게 보면, 나는 어제의 나보다 어떤 부분에서 더 나아졌을까?


그러고 보니, 내 SNS 메신저 대화명이 "Better than before"란 걸 지금에야 상기한다.

나는 그토록, '성장'을 향한 열망이 있었구나.


생존하기 위해.

결국,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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