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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6. 2018

사물과의 이별

마음이 물렁물렁해지는 것이, 계절 탓이나 해야겠다.

평범한 계산기였다.

숫자가 표시되는 흑백 창은 45도로 기울어져 있었고 효율적일까 의문이 드는 태양광 패널은 수줍게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둔 버튼은 큼지막했다. 단순한 계산에 최적화된 버튼 배열은 누가 봐도 대륙에서 만든 비싸지 않은 제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버튼 사이사이엔 때가 묻어 있었다.

어떤 부분은 그것이 들러붙어 물티슈로 닦아내려 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었다. 또는 나의 무관심의 결과였다.


어느 날, 무심히 계산기의 전원을 눌렀을 때, 난 깨진 숫자를 마주했다.

0과 8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어봤다. 책상에 탁탁 쳐보기도 하고, 태양광 패널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치웠다를 반복했다. 끝내 계산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15년 만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건.


신입사원 때부터 나와 함께 해 온 계산기는 그렇게 나와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평범한 계산기가 아니었다. 왼쪽엔 견출지로 신입사원 시절의 부서와 내 이름 석자가 붙어 있었다. 15년을 들러붙어 이 계산기가 내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오랜 직장 생활 동안 한 두 번은 계산기를 잃어버렸을 테지만, 그것은 기어이 나를 찾아 돌아왔을 것이다.


신입 시절에 붙여 놓은 그 이름표를 볼 때마다, 나는 미소 짓곤 했다.

죽도록 힘들었던 시절, 내가 원하지 않던 업무와 사람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미소가 나올 정도로 아련했다. 미친 사람의 실소일까. 추억을 음미하는 나약한 인간의 미소일까. 분명한 건, 계산기를 들어 신입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초심을 기억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륙에서 만들어 싼 가격에 물 건너온 하찮은 제품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매정한 나다.


내가 계산을 하지 않을 때 서랍에 박혀있는, 무심코 어딘가 두고 돌아 돌아 나에게 찾아온 계산기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데도,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별의 힘일까. 오버일까 착각일까.


가을이다.

마음이 물렁물렁해지는 것이, 계절 탓이나 해야겠다.


P.S


사실은, 아직 그 계산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신입사원 시절의 부서와 내 이름이 적힌 견출지는 아직도 계산기에 단단히 붙어있다.

마치, 내가 직장에서 버티기 위해 젖은 낙엽처럼 책상에 딱 붙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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