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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10. 2018

상처

반창고의 수를 줄이고 싶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이 말이 쓰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물론, 어원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말을 쓰면 누구라도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래전 한 연예인이 이성을 꼬시는 것을 '작업'이라고 표현했을 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처럼. 그 이후 '작업'이란 말 한 마디면, 이성을 향한 모든 행동이 쉽게 설명되곤 했다.


'상처'는 물리적 마찰로 일어난다.

물리적 접촉이나 마찰이 없다면 상처는 생기지 않는다. 꼬집거나 때리거나, 던진 돌에 맞거나 해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에 이것을 빗대어 이야기해도 딱 들어맞는다. 누군가 던진 말에 마음은 꼬집히고, 맞고, 상처가 난다. 사람 간의 화학적 반응도 물리적 마찰에 버금간단 이야기다.


직장에서는 이것을 몸소 느끼기 딱 좋다.

직장 생활하면서 마음에 '상처'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상사의 호통에, 동료의 험담에,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의 결과로 인해. 직장인의 마음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가끔은 빨간약을 꺼내어 가슴에 마구 바르고 싶은 날도 적지 않다.


날아오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것은 말로도, 이메일로도, 전화와 메시지로도 온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만 오는 것도 아니다. 직급이 올라가다 보니, 이제는 후배들에게서도 그것은 날아온다. 어떤 일을 요청하거나 지시했을 때, 시큰둥한 후배들의 얼굴은 때론 큰 상처가 된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지만, 꼰대가 되어야 하는 순간. 스스로에게도 상처다.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처'는 받는 자의 억울함이다. 그것을 줄 때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그렇다. 직장이라는 곳이 일을 하다 보면 개인에 대한 배려는 생각지 못할 때가 분명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도 그러했을 것이다.


'상처' 없는 직장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반창고의 수와 빨간약을 바르는 양이 조금은 줄어들었음 좋겠다. 아마도, '상처' 받는 것에 억울해하기만 하기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진 않은지를 돌아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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