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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18. 2018

회의

직장인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

'회의(會議)'는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집단지성'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협력 또는 경쟁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를 말한다.

미미하게 보이는 박테리아, 동물, 사람의 능력이 총의를 모으는 과정을 통해 결정 능력의 다양한 형태로 한 개체의 능력 범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한 마디로,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머리 여럿을 모아보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회의(會議)'를 하다 보면 '회의(懷疑)'가 든다.

너무 자주 모이다 보니, 일 할 시간이 없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회의로 보내고 자리에 앉으면 어느덧 퇴근시간. 야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상사의 눈치'가 거론되지만, 난 이 '회의'문화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20명이 넘게 모인 긴급회의.

말하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호통을 치는 사람과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사람. '호통'이라는 총알은 장전되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다. 이 총알만은 피하고 보자는 가련한 존재들은 괜히 나서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침묵한다. 결국, 표적이 된 한 두 명은 인정사정없이 난사를 당한다.


그러니 '회의'에서 거론된 이슈들이 해결될 리 없다.

이것은 다시 숙제로 떨어진다. '지시사항'과 'F/up 사항' 그리고 회의록으로 남겨져 담당부서나 담당자의 이름에 꼬리표처럼 들러붙어 다닌다. 보고서는 늘어나고, 정작 해야 하는 일은 못하게 되는 것이니, 회의(會議)를 하고 나면 회의(懷疑)가 들 수밖에.


최근엔 이 '회의'와 '보고'문화를 개선하고자 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생겼다.

회의 참석자나 시간을 제한한다. 또는 보고서는 3장 이내로 압축할 것을 요청받는다. (음... 결국, 유첨은 몇 십장이 되지만.) 회의 시간엔 조직 책임자들의 휴대폰을 수거하기도 한다. 회의 중에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팀원 전체가 단체 메신저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로 했다.

직장인의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동안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회사는 각자의 KPI와 R&R로 돌아간다. 이렇게 세분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으니 회의를 하지 않고는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다. 총알을 맞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사람이라면 응당한 것이다. 총알을 피하려는 사람이 비겁해 보이고,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각자의 밥줄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직장은 그래서 각박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살고 봐야 하는 존재들 앞에서 하염없이 소멸된다. 회의(懷疑)를 해봤자 남는 건 자괴감 밖에 없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하거나, 직급이 올라갈수록 부당하고 느꼈던 부분을 고쳐가는 것이 낫다.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해야지"와 같은 다짐을 위한 다짐일지라도 난 이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평생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으니, 어찌 되었건 그것을 잊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어떻게 잘해볼까... 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회의를 통해 협의를 하려 한다.

그것이 '회의(會議)'가 될지, '회의(懷疑)'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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