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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23. 2018

'끝판왕'

짧은 두 단어와 함께, '품의'는 통과된다.

끝판왕: "마지막 판에 이르러 볼 수 있는 왕. 가장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나 그러한 대상을 이른다."

- 어학사전-


어렸을 적.

아기 공룡이 버블을 쏘아대며 적을 가두고 터뜨려 물리치는 게임이 있었다. 한 판 한 판 가다 보면, 100판 째에서 마침내 '끝판왕'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100판까지 가는 여정이 쉽진 않았다. 2인이 한 팀이 되어, 한쪽의 희생이 지속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00판에 이르면 동네 아이들은 모두 모여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지막 판이어서인지, '끝판왕'을 보게 되서인지 모두는 들떠 있었다.


갑자기 그 게임이 생각났던 건, '품의(稟議)' 때문이었다.

그 이름도 생소했던 신입사원 시절엔, 그게 그렇게 곤욕스러웠다. 올리는 '품의'는 족족 '반려(Reject)'되었던 것이다. 이래서 반려, 저래서 반려. 이러고 저래서 반려. 때론, 그 날 먹은 점심이 맛없어서 반려. 날씨가 안 좋아서 반려...


만약 결재 승인자가 여러 명인 품의서라면, 하루 온종일을 그것에 매달리곤 했다.

두 세 단계에 즈음에 이르러 반려를 당하면, 그 이전에 승인을 해줬던 사람들로부터도 질책을 받는다. 어찌 보면 그 사람들도 괜히 나 때문에 반려를 당한 거니까. '반려'는 사람의 기분을 축 처지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다시 써서 올리면 두 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깐깐히 본다. 다시 '반려'를 받지 않기 위해. 그럴수록 나는 더 피곤해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때론 그것을 게임처럼 즐긴다.

우선 '끝판왕=마지막 결재자'를 상기한다. '끝판왕'의 성향을 파악한다. 숫자를 좋아하는지, 그래프 위주로 보는지, 상세 설명을 요하는지, 심플한 표현을 좋아하는지 등. 앞서 언급한 게임에서도, '끝판왕'을 쉽게 물리치려면 버블이 아닌 '불'을 뿜어내는 무기를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더불어, '끝판왕'에 이르기 전에 있는 승인자들에겐 품의를 올리기 전에 미리 설명을 하고 '품의'를 진행했다.

그러고 나서, 결재 페이지를 새로고침 해본다. 한 단계 클리어. 두 단계 클리어. 한 판(?) 한 판 넘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침내 마지막 결재자가 남는다. 아기 공룡이 흐물흐물한 고래 모양의 '끝판왕'을 만난 것이다. 미리 준비한 불 무기를 꺼내 들어 포효하고, 마침내 큰 모양의 고래는 땅으로 꺼진다.


"승인."


짧은 두 단어와 함께, '품의'는 통과된다.




마지막 100판에 이르러 '끝판왕'을 깨고 나면 그다음을 뭘까, 게임기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매우 궁금해했다. 나도 그랬다. '끝판왕'이 쓰러지고 난 뒤, 잠시 엔딩 크레딧이 나오고는 랜덤으로 100판 이전의 어느 곳으로 그 두 마리 아기 공룡은 다시 이동했다. 100판을 향한 여정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호기심 가득했던 아이들은 조금은 허탈해하며 다시금 흩어지고, 남은 두 명은 열심히 자신들의 게임에 집중했다.


인생이... 그렇지 뭐.

'품의'는 그렇게 반복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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